지난해 강의를 들을 기회가 있었던 한 교수님은 “지금은 절대적 빈곤만 줄어들었을 뿐, 불평등 수준은 ‘레미제라블’시대(19세기)와 비슷해졌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저런 그래프를 살펴보니 맞는 말이었다.
얼마 전 이틀간 굶은 실직자가 막걸리를 훔치다 경찰에 잡혔다. 월세가 밀려 방을 빼야 했던 날, 목을 맨 세입자도 있었다. 상위 10%에 몰린 소득 집중도(48.5%), 정규직 대비 비정규직 임금 비율(53.5%), 월급 7,810만원이 넘는 초고소득 직장인 급증(3,403명) 등 모든 불평등 통계가 사상 최대를 갈아치우고 있다.
하지만 이런 뉴스들은 익숙해서 신문 지면에서도 눈에 띄는 공간에서 밀려날 때가 많다. 저임금 노동자 비율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2위를 오간 지 오래된 현실에서, 불평등에 대한 자포자기는 공기처럼 퍼졌다. 너무 편재해서 문제라는 감각도 무뎌지는 것, 그것이 우리가 가장 저항해야 할 인식의 모순인지 모른다.
임금 문제는 노동의 수요- 공급 법칙을 들이미는 경제학의 우격다짐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존재론적 질문이다. 어떤 학자와 이야기하다가 “정책 만든다는 교수들도 저소득층이 어떻게 사는지 모른다는 게, 참 단점이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속한 언론계도 마찬가지이다. 계층간 사다리는 붕괴됐고 정계, 학계, 언론계 사람들 대부분 평균 이상의 배경과 소득을 가진 계층에 속하니, 다시 도래한 ‘가난의 시대’의 실체와 팽배한 아픔을 제대로 모르고 있다는 죄책감도 든다. 19세기 지주와 소작농의 시대처럼, 동시간을 살지만 경험조차 단절됐다.
미국 저널리스트 바버라 에런라이크는 저임금 직업들을 직접 경험해보고 쓴 ‘노동의 배신’에서 “노동 인구의 30%가 시간당 8달러 이하(1998년 당시)를 받는 게 사실이라면 그들은 내가 모르는 생존 비법을 알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예상했다. 겪어본 결과는 반대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만 아는 절약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가난하기 때문에 추가로 드는 비용이 수두룩하다…보증금이 없으니 엄청난 방세를 내고, 정기 건강검진을 받을 수 없어 결국 대가를 치른다”고 했다.
하나의 답은 스웨덴에서 찾을 수 있다. 전국단위 노조가 과거 장기간 연대임금 정책을 내걸고 경영자단체와의 협상에서 상위 근로자의 임금 인상을 억제하고 하위층의 임금을 끌어올린 그 유명한 사례에 대해 누군가는 “눈물 나는 이야기”라고 했다. 일정 수준의 임금을 주지 못하는 기업은 존재할 가치도 없다는 그들의 기조는, 한국의 수준 따위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다 해도 더 나은 세상에 대한 강력한 증거로서 존재해줘서 고마울 따름이다.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 대기업 정규직 임금을 줄이거나 동결하고, 비정규직ㆍ하청근로자 임금을 올리라고 협상을 할 수 있을까? 지난해 300명 이상 대기업 중 임금인상을 자제하고 확보한 재원을 신규채용, 비정규직 처우개선 등에 활용한 기업은 18.8%에 불과했다.
국내에서 드물게 산별 임단협 협상을 하는 금융노조는 고연봉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 은행원의 평균 연봉은 1인당 국내총생산(GDP)의 203%(미국 101%), 절대 액수도 미국 은행원의 평균 연봉보다 많다. 이들의 고연봉은 어디에서 나오는 걸까?
그러니 당신은, 특히 남들이 부러워하는 연봉을 자랑하는 당신은 분명 알아야 한다. 대기업 총수의 변론을 맡아 수십억원을 받는 변호사는 그 돈이 하청업체의 노동자에게 돌아갈 몫이었다는 것, 의사의 고액 임금에는 박봉의 간호사들에게 돌아가야 할 몫이 포함돼 있다는 것, 은행원의 억대 연봉에는 사내 비정규직의 눈물과 후배들을 덜 뽑는 대가가 들어 있다는 것. 아 이쯤에서, ‘나는 남들 놀 때 공부 열심히 했고 노력해서 여기까지 왔다’는 말은 제발 말아달라.
근본적인 원인은 강력한 비정규직 제도 및 노조 배제정책을 써온 정부, 또 부도덕한 경영자들에게서 찾아야 한다고 지적할 사람도 많을 것 같다. 맞는 말이다. 나는 애초 이들에 대해서는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조와 노동자끼리의 문제를 이야기하고 싶었다. 언제부터인가 눈에 띄는 지도자 한 명 나오지 않고, 찢기고 축소된 한국의 노동계가 하루 빨리 힘을 얻고 연대의식을 갖춰 제 역할을 해주길 바란다. 또 조만간 ‘최순실 정권’이 끝나고 최소한의 신뢰라도 갖춘 차기 정부가 들어선다면, 정부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를 바란다.
이진희 정책사회부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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