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좁은 골목 실외기 기어 오르고
높은 외벽 익숙한 듯 망원경 동원
496가구 돌고서야 일과 마무리
2분이면 끝나는 안전 점검은
응답 없고 “내일 와라” 짜증 연속
주말까지 일해도 한달 130만원
일부 동료 “처우 개선” 파업 나서
지난 8일 오전 서울 홍제3동의 한 낡은 4층 주상복합 건물 앞. 가스 검침(가스 사용량 측정)을 위해 두리번거리던 16년차 가스 검침원 김미현(53ㆍ가명)씨가 거친 한숨을 내뱉었다. 건물을 한 바퀴 빙 돌아 외벽에 달려 있는 계량기 7개를 발견했지만, 담벼락때문에 성인 1명이 간신히 들어갈 만큼 비좁다. 이마저도 에어컨 실외기가 가로 막아 계량기 2개는 확인할 수 없다. 실외기를 기어 올라 반대편으로 넘어 가서야 간신히 검침이 끝났다. 김씨는 “이럴 때는 스파이더맨처럼 벽을 탈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웃었다.
김씨가 속한 서울도시가스 강북5고객센터의 가스검침원 33명 중 노조원 20명은 지난 1일부터 낮은 임금 체계와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파업 중이다. 비노조원인 김씨는 원래 녹번동 담당이지만 이날은 파업 중인 동료의 지역을 지원하기 위해 홍제3동 검침에 나선 터였다.
검침은 계량기와의 숨바꼭질이었다. 초인종도 없는 주택 내부에 계량기가 있기라도 하면 까치발을 들어 담벼락 너머 계량기를 확인하려 애를 써야 했다. 옥상이나 주차장 뒤, 지하실에 계량기가 숨어 있을 때면 주인에게 일일이 전화해 거미줄 사이를 뚫고 자물쇠를 풀고서야 확인이 됐다.
점심시간이 가까워올 무렵 난관에 봉착했다. 3층 다세대 주택 외벽에 계량기가 있었지만 너무 높아서 동행했던 기자가 점프를 해도 읽을 수 없었다. 난감한 표정의 기자와 달리 김씨는 어느새 가방에서 작은 망원경을 꺼내더니 초점을 맞춰 5미터 뒤에서 계량기 숫자를 읽고 있었다. 김씨는 “계량기가 아주 높이 있거나 담벼락 멀리 있을 때에 대비해 구입한 것”이라며 “좁은 골목처럼 몸이 들어갈 수 없을 때는 셀카봉이나 손잡이가 긴 거울을 쓰는 검침원들도 더러 있다”고 했다.
그래도 검침 업무는 집밖에서 이뤄져 그나마 나은 편이다. 오후에는 김씨의 담당구역인 녹번동에서 집 내부 가스 안전 점검에 나섰다. 가스레인지, 보일러 등에서 가스가 새지 않는지 확인하는 2분이면 끝나는 업무지만, 응답 없는 메아리의 연속이었다. 초인종을 누르고 “계세요”를 외쳐도 답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 힘들게 빌라 4층 꼭대기까지 계단으로 올라 초인종을 눌렀는데, “나 오늘 혼자 있단 말이야!” “왜 연락도 없이 갑자기 오냐”는 짜증만 돌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김씨는 “지난해 한 젊은 남성은 집에 있으면서도 이유 없이 12번이나 ‘내일 오라’고 한 경우도 있었다”고 토로했다. 김씨는 집집마다 신발을 벗어야 해 오후 내내 등산화 뒤축을 구겨 신고 다녔다.
오전 9시30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이날 김씨와 동행한 8시간 동안 방문한 가구는 496가구. 스마트 기기에 찍힌 거리는 9.14km, 걸음 수로는 1만2,316보였다. 축구선수가 한 경기 90분간 10km 가량을 달린다고 하니, 검침원들은 매일 축구 한 경기를 소화하는 셈이다. 김씨는 “입사 초기에는 살이 빠지고 다리가 부어 3일에 한번은 마사지를 받아야 했다”며 “지금은 따로 운동을 안 해도 팔과 다리에 근육이 생겼다”고 웃었다.
하루 8시간 가량 일하는 가스검침원 대부분은 주말에도 서너 시간 추가 근무를 하며 월 평균 130여만원을 받는다. 최저임금 수준이다. 이런 가스검침원은 서울시에만 1,048명이 있다. 파업을 하고 있는 강북5고객센터 노조 관계자는 “우리가 많은 것을 바라는 게 아니다”며 “노동강도에 맞게 같은 센터 내 행정직과 동일한 식대, 상여금 정도를 요구하는 것뿐”이라고 말했다.
글ㆍ사진=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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