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들에 양말 차림ㆍ등산복…
어색하다 손사래는 옛말
‘자유로움’ 상징성 얻어 인기
흰색 스포츠 양말을 신고 아무렇지 않은 듯 샌들에 발을 밀어 넣는 풍경은 뱃살 두둑한 아저씨들이나 감행하던 ‘패션 테러’ 행위였다. 무좀 치료를 위한 발가락 양말이나 계절 변화에 둔감한 사계절 전천후 등산복 차림 역시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아저씨들의 패션 전매 특허로 여겨졌다.
2030세대에게 ‘용서 받을 수 없는’ 패션 스타일이던 이들 제품이 최근 들어 반전을 맞고 있다. 패션 감각 제로에 가까운 이들 제품이 ‘아재템’이란 이름으로, 젊은 층에서 뜻밖의 인기를 얻고 있다. 외양 대신 실용적 기능에 초점을 맞춘 이들 아재템이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젊은 층 특유의 자유로운 분위기와 맞아떨어지면서 ‘실용적 멋’으로 재해석되고 있는 모습이다.
양말X샌들 “금기에서 파격으로”
“아빠, 샌들을 신든지 양말을 신든지 제발 하나만 택해주세요.” 샌들에 양말을 신고 동네를 오가는 아버지들의 심드렁한 모습은 구한말 갓 쓰고 양복 입던 차림처럼 뭇 자녀들의 가슴을 무너뜨리던 최악의 패션 조합이었다.
샌들에 양말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 고정 관념을 깨뜨렸던 것은 파리 유학파 출신 음악가 정재형씨였다. 2011년 여름 MBC 간판 예능프로그램 ‘무한도전’에 그가 검은 양말에 로마 검투사들이 신는 샌들을 신고 출연하면서 국내 패션계에 낯선 충격을 던졌다. 기존 패션 문법을 무너뜨리는 앙팡 테리블이었던 셈. 젊은 층 사이에서 호불호가 갈리긴 했으나 정씨의 ‘양말 샌들’ 패션이 ‘파리지앵 패션’으로 서서히 받아들여지면서 최근에는 대중적 패션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여름이면 샌들 양말 조합을 즐긴다는 회사원 김지은(32)씨는 “몇 년 전에는 양말 샌들 차림이 매우 어색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색다른 멋이 있다”며 “지난해부터는 대학가 인근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차림이 됐다”고 설명했다. 지난 여름부터 젊은 층이 주로 사용하는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인스타그램에는 샌들에 각양 각색의 양말을 신은 사진이 수백여장 올라와 있다. ‘샌들에 양말은 금기’라는 일종의 패션 터부가 무너지면서 다양한 샌들 양말 스타일이 봇물 터지듯 만개하고 있는 것이다.
샌들 양말 패션의 멋과 효용성은 추운 겨울에 위력을 더하고 있다. 앞부분이 막힌 샌들이나 털이 달린 샌들이 나오면서 한겨울에도 양말과 함께 신고 다니는 게 가능해 멋과 보온성이 겸비됐기 때문이다. 최근 겨울용 샌들을 해외에서 구매한 김상현(28)씨는 “겨울용 샌들에 포인트를 줄 수 있는 도톰한 양말을 신으면 따듯함과 동시에 멋도 챙길 있어 좋다”고 말했다.
등산복 “자유로운 삶 상징하죠”
지난해 5월 한 여행사에서 해외여행을 가기 전 보낸 단체 문자가 온라인에서 논란이 됐다.
‘유럽은 등산을 하는 곳이 아니라 아름다운 도시를 여행하는 곳입니다. 등산복은 꼭 피해달라’는 내용을 두고 ‘등산복이 뭐 어때서’라는 갑론을박으로 시끌했다. 이처럼 여행 가면 으레 등산복을 입고 나올 만큼 중장년층에게 등산복은 야외 활동의 평상복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카페, 박물관, 음악회 등에 나설 때도 등산복을 차려 입는 아버지들 앞에서 ‘왜 부끄러움은 우리의 몫이냐’고 속앓이를 했던 자녀들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저씨들의 필수 아이템인 등산복이 요즘은 젊은 층에서 각광 받고 있다. 활동하기 편하면서도 겨울철 보온 기능이 탁월하다는 이유에서다. 등산복 예찬론자인 회사원 이상진(28)씨는 “중장년층이 선호하는 등산복 스타일과 젊은 세대들이 선호하는 등산복은 분명히 다르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굳이 등산을 하지 않더라도 겨울철에 따듯하면서도 디자인까지 좋은 제품을 마다할 이유가 없다”고 했다. 젊은 세대들에게 인기가 높은 미국 등산복 전문 브랜드인 P사 관계자는 “자유로운 삶과 자연 보호를 강조하는 등산복 이미지가 젊은 층의 감성에 파고 든 것 같다”고 말했다.
발가락양말 “무좀용 양말 아니라 토삭스”
지간형 족부 백선에 시달리는 중장년층이 선호하는 양말, 쉽게 말해 무좀 치료용 발가락 양말 역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아재 제품’이다. 하루 종일 통풍이 안 되는 가죽 구두를 신고 자식들을 위해 일하는 아저씨들에게 무좀은 영광의 질병과 같다. 하지만 아버지는 용서할 수 있더라도 내 남자친구 혹은 여자 친구가 발가락 양말을 신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던 젊은 층에서 발가락 양말도 새로운 아이템으로 떠올랐다.
. 지난달말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 위치한 한 필라테스 센터에서 발가락 양말을 신은 20대 여성들이 강사의 지시에 맞춰 열심히 땀을 흘리고 있었다. 이 곳에서 발가락양말은 마치 신분 세탁이라도 한 듯 ‘토삭스’(toe-sock)로 불린다. 필라테스 강사 5년 차인 손승원(27)씨는 “토삭스는 미끄럼 방지뿐만 아니라 중요 근육들이 뭉쳐있는 발가락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어 건강에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발가락 양말의 높은 보온성도 이미지 변신에 도움을 주고 있다. 지난 9월 아이를 출산한 조희수(29)씨는 평소 수족냉증으로 고생을 하던 차에 인터넷에서 발가락 양말을 대량 구매했다. 조씨는 “처음에는 발가락 양말을 신는 게 민망하기도 했지만 일반 양말과 달리 보온성과 땀 흡수력이 좋아 수족냉증이 한결 가셨다”고 말했다. 온라인 쇼핑몰 G마켓 관계자는 “무좀이 줄어드는 겨울철에도 양말 안에 숨겨 신을 수 있는 발가락 내복을 포함해 발가락 양말 관련 매출이 전년 대비 20% 증가했다”고 설명했다.
블루투스 이어폰 “이보다 편할 수 없다”
블루투스 이어폰은 처음 출시됐을 때만 해도 ‘아재 제품’이란 인식이 강했다. 제 아무리 세련된 정장을 빼 입는다고 하더라도 이어폰을 목에 두르면 패션감이 살아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패션 커뮤니티에서도 “넥밴드 블루투스 이어폰 하면 아재 감성인가요?” “블루투스 이어폰 뭐가 제일 덜 아재 같나요” 같은 질문이 적지 않았다.
블루투스 이어폰은 젊은 세대가 쉽게 선택할 수 없는 아이템이었지만 사용자가 늘면서 이런 인식도 변하고 있다. 블루투스 이어폰이 주는 편리함을 무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지난 여름 넥밴드 블루투스 이어폰을 구매한 한소연(25)씨는 “매번 전화를 하기 위해서 휴대폰을 꺼내고 이어폰을 연결하는 번거로움이 한 번에 해소돼 항상 착용하고 다닌다”고 말했다. 물론 애플이 지난해 아이폰7을 내놓으면서 이어폰 단자를 제거해 아이폰 사용자들로선 어쩔 수 없이 블루투스 이어폰을 사용할 밖에 없게 된 측면도 있지만, 아재 제품이란 거부감은 한결 사려졌다. 덴마크 B사의 신형 블루투스 이어폰은 30만원을 호가하지만 2주를 기다려야 제품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시장 상황이 변한 것이다. 서울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음향전문업체 관계자는 “배터리 기술이 발달하면서 세련된 디자인의 여러 제품들이 출시돼 판매량이 매년 15% 정도씩 증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김정현 기자 virtu@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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