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 동림지 등에 대거 몰려
20일쯤 당진 삽교호로 이동
야생조류서 잇단 바이러스
당국 “도래지 인근 방역 강화”
“애꿎은 철새에게 책임” 지적도

영국 BBC의 다큐멘터리 ‘살아있는 지구’(Planet Earth)에서 경이로운 자연의 모습으로 소개될 만큼 아름다운 군무(群舞)를 자랑하는 가창(街娼)오리가 조류 인플루엔자(AI) 재발의 ‘복병’으로 떠올랐다. 겨울이 끝나며 한국을 떠나는 가창오리 수십만마리의 대규모 북상(北上)이 꺼져가던 AI 바이러스의 불씨를 키울 수 있다는 게 방역 당국의 판단이다.
8일 농림축산식품부에 따르면 이날까지 야생조류에서 발견된 고병원성 AI는 총 53건이다. 특히 지난 7일 전북 고창군 동림지의 가창오리에서 2건의 H5N6형 고병원성 바이러스가, 쇠기러기에서도 1건의 H5N8형 바이러스가 검출됐다. 또 전남 여수시와 경기 용인시 수리부엉이에서도 H5N6 각 1건, 충남 홍성군의 청둥오리에서도 H5N8 1건이 발견되는 등 7일 하루에만 야생조류에서 총 6건의 고병원성 AI가 검출됐다. 이날 전북 김제시 산란계 농장이 H5N8 확진 판정을 받기 전까지 농장에선 AI가 잠잠한 것과 달리 야생조류에선 오히려 AI 바이러스 검출 빈도가 더 늘고 있다.
방역당국은 북상을 앞둔 가창오리의 동선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영어로 바이칼 쇠오리(Baikal Teal)이라고 표기되는 가창오리는 러시아 시베리아 지방에서 번식한 뒤 동아시아 지역에서 겨울을 나는 철새다. 전 세계적으로 수십만마리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95% 이상이 우리나라에서 겨울을 보낸다. 도래지는 서해안 지역의 주요 호수와 저수지다. 가창오리는 다른 오리류와 달리 수만마리씩 집단을 이뤄 생활한다. 아름다운 외형 때문에 ‘가창’(거리의 여자)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있지만 근거는 명확하지 않다.
현재 가창오리는 전북 고창군 동림지 등에 대거 몰려 있다. 방역당국은 가창오리 수십만마리가 이달 20일을 전후로 해 충남 당진시 삽교호쪽으로 이동할 것으로 보고 있다. 농식품부 고위 관계자는 “2년 전에도 가창오리에서 AI가 시작된 적이 있다”며 “가창오리의 대규모 이동을 앞두고 AI에 오염된 폐사체가 나온 점은 불길한 징후”라고 말했다. 방역당국은 가창오리가 북상하기 전까지 도래지 인근 지역에 대한 방역을 강화하겠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본능에 따라 번식지로 이동하는 철새를 막는 것은 불가능해 대응 자체가 쉽지 않다. 이동지역 예찰을 강화하거나 철새에게 먹이를 줘 농가 접근을 사전 차단하는 정도가 가능할 뿐이다.
그러나 정부가 가창오리에게 화살을 돌리는 것을 두고 “애꿎은 철새에게 책임을 덮어 씌우려 한다”는 비판도 나온다. 한 수의사는 “가창오리는 바이러스를 배출하는 양이 상대적으로 적거나 바이러스를 이겨내는 종”이라며 “AI 발생시점과 가창오리가 한국에 온 시점을 비교하면 가창오리가 오히려 한국에 와서 AI에 감염된 피해자라고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전문가는 “바이러스가 닭이나 오리 몸에 잠복해 있다가 겨울에 본격적으로 활동한 것일 수 있다”며 “방역에 실패한 정부에게 더 큰 책임이 있다”고 말했다. 세종=이영창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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