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지배구조를 바꾸기 위해 법을 강제적, 일률적으로 바꾸면 기업들은 수술 도중 사망하는 상황을 맞게 될 수도 있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상법 개정안 처리가 2월 임시국회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면서 재계가 상법 개정안에 공개적으로 반대 의견을 밝혔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라는 입법취지에는 공감하지만 상법 개정안의 핵심내용들이 시장경제 원칙을 훼손 한다는 주장이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최근 국회가 추진 중인 상법 개정안에 대해 경제계의 입장을 담은 리포트를 작성해 국회에 전달하기로 했다고 8일 밝혔다.
재계가 반대하는 6개 조항은 ▦감사위원 분리선임 ▦집중투표제 의무화 ▦근로자대표 등이 추천한 사외이사 의무 선임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전자투표제 의무화 ▦자사주 처분규제 부활 등이다.
6개 조항 중에서도 가장 논란이 되는 것은 감사위원 분리 선출 조항이다. 감사위원 선출 때 총수 일가와 대주주의 입김이 들어가지 않도록 대주주를 포함한 모든 주주의 의결권을 최대 3%로 제한하는 것이 골자다. 대신 소액주주가 선출하는 감사위원 숫자를 늘려 이사회 감시ㆍ견제 기능을 강화하자는 취지다.
그러나 재계는 이렇게 법이 개정될 경우 해외 투기자본 다수가 결탁해 입맛에 맞는 인사를 선임해 이사회를 장악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 예를 들어 51%의 지분을 갖고 있는 대주주 A씨와 19%의 지분을 보유한 B씨가 감사위원을 선출할 때 행사할 수 있는 의결권은 각각 최대 3%로 총 6%에 그친다. 하지만 지분 3%씩을 가진 외국계 펀드 5개가 연합하면 15%의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재계 관계자는 “지분이 0.1%에도 못 미치는 소액주주들은 아무리 단합해도 자신들이 원하는 감사위원을 선임할 수 없을 것”이라며 “입법 취지와 달리 외국계 펀드 등 기관투자자만 유리해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집중투표제도 투기 자본이 악용할 수 있는 조항으로 꼽힌다. 주총에서 두 명 이상의 이사를 선임할 때 주주가 보유한 주식 1주마다 선임할 이사 수만큼 의결권을 주고 이를 특정 후보에게 몰아 줄 수 있도록 하는 것인데 이 역시 적대적 인수합병(M&A) 세력이 여러 개의 펀드를 이용해 지분을 분할 매수한 뒤 특정 후보에게 몰표를 주는 방식으로 이사회를 장악할 수 있다.
이동근 대한상의 부회장은 “상장사를 개인 회사처럼 운영하거나 분식회계와 편법상속 등을 일삼는 것은 없어져야 할 구시대적 관행이지만 장기불황과 글로벌 경쟁 등 이중고에 시달리는 기업들의 경영 자율성까지 제한하면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상법 개정안을 통해 소액주주를 보호한다고 하지만 실제 소액주주들 중에서는 평균 지분 보유 기간이 짧은 투기적 주주들이 적지 않은 게 현실”이라며 “오히려 대형 펀드들의 입김만 키우는 부작용이 생길 수 있고, 경제민주화와 상관없이 전체 기업에 대한 규제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고경석 기자 kav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