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치 3000만원 비싼 약값에
전문의 심의위서 처방 사전 심사
건보 적용 결정권 가진 심평원
심의위 승인 74건 중 10건 불허
“결핵 퇴치 의지 있나” 비판
10년 넘게 결핵을 앓아온 30대 여성 A씨는 결국 ‘마지막 희망’을 접어야 했다. 기존 약들이 듣지 않아 치료 방법이 없던 A씨의 마지막 희망은 최근 출시된 결핵 신약이었다. 이 약을 쓰려면 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주치의는 신약을 쓰지 않으면 A씨가 결핵을 퍼뜨릴 위험이 높다는 점을 들어 처방 승인을 요청했다. 전문의들로 구성된 심의위원회도 만장일치로 승인했다. 그러나 의약품 심사당국은 의학적 근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최종 불승인을 통보했다. 주치의는 “방법을 찾아볼 테니 많은 사람과 접촉하지 말고, 몇 달 뒤 다시 오라”고 다독여 A씨를 돌려보냈다. “환자가 아무리 조심해도 가까운 사람에게 전염될 가능성은 상존한다”며 “결핵을 퇴치하겠다는 정부가 중증 환자 치료에 너무 소극적”이라고 주치의는 답답해했다.

6일 의료계와 제약업계에 따르면 40년 만에 개발된 결핵 신약의 혜택이 당국의 높은 심사장벽 때문에 환자들에게 충분히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이례적인 이중심사 제도까지 도입된 탓에 신약이 꼭 필요한 환자가 제때 약을 못 쓰는 경우도 늘고 있다는 지적이다.
신약을 무력화하는 주요 요인은 지난해 9월 도입된 사전심사제다. 결핵 신약이 처방된 후 뒤늦게 건강보험이 자꾸 삭감되는 것을 막기 위한 제도다. 보험이 적용되기 시작한 2015년부터 지난해까지 결핵 신약은 약 300건 처방됐다. 그러나 그 중 30여건의 보험이 삭감됐다. 의료진이 제시한 처방 필요성에 대해 심사당국이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 신약의 6개월치 약값은 약 3,000만원. 보험이 삭감되면 환자가 약값을 부담하지 않는 이상 병원은 비싼 약을 처방하길 꺼릴 수밖에 없다. 이에 전문의로 구성된 사전심사 심의위원회가 개별 처방에 대해 일일이 보험 적용이 합당한지를 평가한 뒤 그 결과를 바탕으로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최종 승인 여부를 결정하기로 했다.
그런데 A씨 사례처럼 위원회의 결정을 심사당국이 뒤집는 경우가 생기고 있다. 지난달까지 위원회가 보험 필요성을 인정한 74건 가운데 10건이 불승인됐다. 이들에겐 다른 치료법이 없다. 의료계에선 환자 상태를 가장 잘 아는 주치의와 전문의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는데 대해 우려가 크다. 한 결핵 분야 전문의는 “서류 준비와 검토 절차 때문에 보험 승인까지 길게는 2주~한 달을 기다리기도 했다”고 토로했다. 그 사이 환자는 부작용이 심한 다른 약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사전심사제의 한계를 인지한 정부는 결핵 신약의 보험 기준을 별도로 만들기로 했다. 이를 위한 전문가 자문회의가 9일 열린다. 하지만 기준이 나와도 혼란은 당분간 계속될 거란 예상이 지배적이다. 신약이라 임상자료가 많지 않은 만큼 보험 심사에 주관이 개입될 여지가 크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강력한 결핵 퇴치 의지를 보여야 한다고 촉구했다. 심태선 서울아산병원 호흡기내과 교수는 “암 같은 다른 질환에 비해 중증 결핵 환자는 현저히 적다”며 “결핵 근절을 위한 최우선 순위는 중증 환자 치료”라고 강조했다. 강형석 국립마산병원 흉부내과 과장도 “보험재정 논리에서 벗어나 시급한 처방에 대해선 전문가 의견을 존중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결핵 발생국 1위 자리를 20년째 지키고 있다. 정부는 이 오명을 벗기 위해 2015년 “결핵 치료비는 전액 건강보험에서 지원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임소형 기자 precar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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