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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길 위의 이야기] 길을 틀다

입력
2017.02.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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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이십 대 초반, 나는 참 자주도 먹을 갈았다. 학과장 교수가 서예가였기 때문이었다. 교수님은 걸핏하면 학생들을 연구실로 불러 먹을 갈게 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제일 자주 불려갔다. 복도 끝에 선 조교가 손을 까딱까딱 흔들며 부르면 나는 울상을 했다. “어쩌겠어. 교수님이 너 오라는데.” 짧으면 네 시간, 어떤 날에는 일곱 시간을 한 자리에 앉아 먹을 갈아야 했다. 사부작사부작 화선지 넘기는 소리와 또 사각사각 벼루 위에서 먹을 긋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연구실 창 밖으로 노을이 졌고 잣나무가 흔들렸다. 나는 먹을 쥐고 종종 졸았다. 먹물 냄새는 은은하고 고소했지만 그 시간을 버티는 일은 몹시 지루했다. 그보다 더 지루한 일은 중국어 공부였다. 나는 학부를 졸업하는 대로 유학을 떠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내 귀에, 중국어는 도통 아름답게 들리지 않았다. 소리도 그랬고 글자도 그러했다. 내 귀에 아름답지도 않은 언어를 내내 익히고 있는 나 자신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중국어 교수는 중간고사와 기말고사를 각각 200문제씩 내 주었는데, 100문제는 중국어 문장을 한국어로 옮기는 거였고 100문제는 한국어 문장을 중국어로 옮기는 거였다. 그야말로 폭력적인 시험이었다. 꽤나 꼼꼼하게 미래를 준비하고 있다고 으스댔지만 사실 하루에도 몇 번씩 겁이 더럭 났다. 어쩌면 평생 재미도 없는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결국 나는 아주 딴 일을 하며 살고 있지만 지금이 더 좋고 나쁘고를 따질 일은 아니다. 억지로 먹을 갈지도 않고 재미없는 중국어 따위 다 까먹어도 되니 어쨌거나 길을 튼 건 괜찮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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