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사회운동 대표적인 원로로 평생 민족화합을 위해 헌신해 온 서영훈 전 대한적십자사 총재가 4일 오전 9시쯤 입원 중이던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4세.
1924년 평남 덕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어릴 때부터 폭넓은 독서로 식견을 넓혀 충성, 용서, 화합을 뜻하는 ‘충서화(忠恕和)’를 좌우명으로 삼았으며, 광복 직후 서울로 와서 조선민족청년단에 가입했다. 김구, 장준하 선생 등 독립운동가 출신 지도자들과 가깝게 지내며 종합교양지 ‘사상(思想)’ 발행에 참여했다.
고인은 1953년 대한적십자사와 처음으로 인연을 맺은 뒤 청소년 국장으로 부임해서 청소년적십자를 설립, 중·고교생들에게 해외연수 기회를 제공하는 등 인재 양성에 힘썼다. 그는 1972년 적십자사 사무총장에 올라 1981년까지 10년간 같은 자리에서 헌신했다. 적십자사는 “고인은 특히 1980년 5ㆍ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현장에서 직접 앰뷸런스를 타고 시민들을 구호했다”며 “인도주의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평가했다. 매혈을 없애고 헌혈 사업으로 전환하는 업적도 남겼다.
고인은 남북 교류에도 힘썼다. 1972년 8월 평양에서 열린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을 시작으로 수 차례 열린 회담에서 남측 대표로 참석했고, 이를 기반으로 1985년부터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성공적으로 시작됐다. 그는 외부 강연을 통해 “북한을 통해 배울 건 배워야 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고인은 적십자사를 떠난 뒤 1982~1986년 자신이 존경하는 인물인 도산 안창호 선생이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인 흥사단의 이사장을 지냈고, 1996년에는 대북지원 민간단체인 우리민족서로돕기운동 상임대표를 맡았다.
그는 2000년 새로 창당한 새천년민주당의 대표를 맡으며 정계 진출을 선언했다. 그 해 열린 총선에서 국회의원이 돼 민주당 대표로 재신임 받았으나, 이듬해인 2001년 제22대 적십자사 총재로 2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갔다. 2003년 임기를 마친 이후에도 사회운동과 민족화합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민주당 대표 시절 의원들과 시장을 방문하던 중 물건을 사기 위해 지갑을 열어보니 2,000원만 있었다는 일화, 적십자사 사무총장 시절 집에 전화가 없어 남북회담을 추진하던 정부 관계자들이 그의 집을 찾느라 진땀을 흘렸다는 일화 등은 그의 청빈한 삶을 엿보게 한다.
부인 어귀선 씨와 사이에 아들 홍석·유석·경석, 딸 희경 씨 등 3남 1녀를 두고 있다. 발인은 7일 오전 9시, 빈소는 강남구 일원동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 3호실. (02)3410-6903
정준호 기자 junhoj@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