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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트럼프 ‘신(新) 문화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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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와 트럼프 ‘신(新) 문화 전쟁’

입력
2017.02.03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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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터 작가 셰퍼드 페어리의 '위 더 피플' . 소수자를 차별하는 트럼프 대통령에 저항하는 의미다. 셰퍼드 페어리 홈페이지
포스터 작가 셰퍼드 페어리의 '위 더 피플' . 소수자를 차별하는 트럼프 대통령에 저항하는 의미다. 셰퍼드 페어리 홈페이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 다음날인 지난달 21일. 미국 주요 도시에서 열린 반(反) 트럼프 시위 현장 곳곳에 성조기를 히잡처럼 머리에 두른 무슬림 여성, 머리에 꽃을 꽂은 남미 여성, 레게머리 흑인 여성을 배경으로 ‘We the people’이라는 문구가 쓰인 포스터가 등장했다. 이 포스터는 2008년 대선 후보였던 버락 오바마 얼굴 사진 옆에 ‘희망(Hope)’이라는 낱말을 써넣어 널리 알려진 포스터 제작자 셰퍼드 페어리의 작품. 페어리는 CNN 방송 인터뷰에서 “무슬림과 여성, 흑인 등 포스터에 등장하는 이들은 모두 트럼프 정부에서 무시될 사람들”이라며 “그는 다양한 국민을 존중하지 않는 편협한 인물”이라고 비판했다.

메릴 스트립에서 필립 로스까지 한 목소리

반 여성ㆍ반 이민ㆍ반 이슬람 기치를 든 트럼프 대통령과 예술ㆍ문화ㆍ연예계 사이에 대립이 심상치 않다. 자유주의ㆍ진보 성향이 강한 예술인들이 보수 정치인들과 불화를 겪는 건 어제 오늘 일이 아니지만 최근 ‘반 트럼프’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다. 배우 메릴 스트립이 포문을 열었다. 지난달 8일 골든글로브상 시상식에서 그녀는 “혐오는 혐오를 낳고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권력자가 다른 사람을 괴롭히려고 자신의 힘을 사용한다면 우리는 모두 패배하게 된다”고 비판했다. 트럼프가 취임하자 가수 마돈나가 공세를 이어갔다. ‘여성들의 행진’에 참가한 그녀는 “끔찍하다. 백악관을 폭파시켜 버리고 싶다”고 직설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지난달 27일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이슬람 7개 국가 출신자 입국을 제한한 ‘반이민 행정명령’이 발효되자 비판 은 더욱 뜨거워졌다. 록 가수 브루스 스프링스틴은 지난주 호주 공연 도중 “미국은 이민자 나라다. 트럼프의 행정명령은 미국적이지도 않고 민주적이지도 않다”는 구호를 외쳤다.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보수 성향 여배우인 제인 폰다까지 트럼프 비난에 가세했다. 캐나다와 미국을 잇는 키스턴 XL 송유관 프로젝트가 승인되자 그녀는 트럼프를 ‘포식자 사령관(predator-in-chief)’이라고 깎아 내렸다. 노벨문학상 단골 후보인 작가 필립 로스는 “트럼프는 역사, 과학, 철학, 예술에 무지하고 쓸 줄 아는 어휘가 77개밖에 안되는 수준 낮은 대통령”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로스는 또 친 나치주의ㆍ인종주의자였던 조종사 찰스 린드버그가 미국 대통령이 된다고 상상해 자신이 쓴 가상소설 ‘반미음모’(2004년) 를 언급하기도 했다. 그는 “린드버그는 기본 자질을 갖춘 영웅적 인물이지만 트럼프는 단지 사기꾼일 뿐”이라고 꼬집기까지 했다.

트럼프, 예술인 지원 중단 카드 만지작

트럼프 측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트위터에 “메릴 스트립은 할리우드에서 가장 과대평가된 배우 중 한 명”이라는 글을 올렸고, 라인스 프리버스 비서실장은 마돈나를 향해 “오바마 때는 혹시 백악관을 폭파시키고 싶지 않았느냐”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물론 트럼프를 옹호하는 연예계 인사들도 있다. 배우 로잔느 바가 그 중 한 명이다. 그는 이달 말 열리는 아카데미상 시상식 외국어영화상 후보로 참석하려던 이란 감독 아쉬가르 파르하디가 반이민 행정명령 때문에 갈 수 없게 되자 자신의 트위터에 이런 일로 트럼프를 비난하지 말라는 게시물을 남겼다. 그는 “할리우드 배우들은 파르하디가 무사히 입국하는 데 관심있는 게 아니라 단지 그를 트럼프를 비꼬거나 낙인 찍는 선전도구로 사용하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진정성이 의심된다는 뜻이다. 배우 존 보이트, 랩 가수 카니예 웨스트, 농구선수 데니스 로드먼 등도 트럼프 지지자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 행정부가 문화 예술계를 통제하려는 움직임도 포착된다. 미국 의회 전문매체 더 힐에 따르면 트럼프 정권 인수팀은 대학ㆍ도서관ㆍ예술인 등을 지원하는 미국 예술기금(NEA)과 미국 인문학기금(NEH) 폐지를 검토했다. 과거 공화당 정권들과 마찬가지로 트럼프 측도 표면적으로는 방만 경영을 근절하고 예산을 줄이기 위해 이 기금을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는 진보 우위인 문화계를 재편하려는 정치적 기획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1989년 NEA 기금을 지원받은 안드레 셰라뇨라는 작가가 자신의 오줌, 피, 정액을 담은 통에 십자가를 빠뜨린 작품 ‘오줌 속의 예수(Piss Christ)’를 전시했는데, 기독교계가 반발했고 공화당 정치인들도 NEA를 폐지해야 한다며 공세를 펴기도 했다. 반면 진보적 예술인이 주로 지지하는 민주당은 NEA 축소 혹은 폐지를 모두 반대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후보 시절인 지난해 3월 “예술과 문학 교육 지원을 통한 통합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예술인들은 트럼프 당선 후 불투명해진 NEA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

트럼프 비판이 트럼프 입지 강화하나

언론도 트럼프와 예술인들 간 대립 현상을 주목하고 있다. 영국 가디언은 지난달 31일 특집 기사를 통해 본격적인‘신 문화 전쟁’이 발발했다고 진단했다. 1989년 ‘오줌 속 예수’사태로 보수 정치인과 예술가들이 소송을 불사하는 격전을 치른 이후 다시 전선이 형성됐다는 얘기다. 예술인들은 트럼프가 문화 다양성을 훼손하고 표현의 자유를 위축시킨다고 공격한다. 반면 트럼프와 트럼프 지지자들은 이들이 위선적이라고 비판한다. 부유한 엘리트 예술인들이 마치 문화 다양성을 존중하고 미국인의 양심을 대변하는 사람들은 자신들뿐인 것처럼 행동한다는 것이다.

트럼프를 비판하는 일은 표현의 자유, 문화 다양성과 같은 미국사회의 기본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이고, 이런 노력은 계속되겠지만 역설적으로 이는 트럼프의 위상만 높여줄 거라는 분석도 나온다. 주간 뉴요커는 “트럼프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반대하는 방식으로 명성을 쌓아왔다”며 “그의 추종자들은 트럼프가 하자는 데로 모든 것을 거부하게 될 것이고 이때 자신들이 자유롭다고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메릴 스트립 사례가 보여주듯 트럼프는 자신에 대한 비판에 대해 즉각 반박하는‘거부의 정치’로 지지자들을 규합하고 영향력을 유지하게 될 것이라고 뉴요커는 예상했다.

이왕구 기자 fab4@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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