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 행정부의 반이민 정책이 국제적으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단지 남의 나라 미국만의 일이 아니다. 이민자의 나라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자유와 평등의 나라에서 자국민 이기주의가 팽배하고 있음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인생과 마찬가지로 역사에도 굴곡은 있다. 인류 역사는 꾸준히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자유와 평등이 신장되는 방향으로 흘러왔지만 때로는 역주행하기도 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그랬고, 두 차례 세계대전 역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지금 세계는 또 한 번 위기를 맞고 있다. 자유, 평등, 박애, 개방 등 인류가 발전시켜온 보편가치의 위기다. 지난해 브렉시트로 영국이 고립주의를 선택하더니, 미국에서는 노골적으로 미국우선주의를 내건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돼 세계를 놀라게 했다.
갓 취임한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27일 반이민 행정명령에 서명하고 몇몇 무슬림 국가에 한시적으로 국경을 닫아버렸다. 자유주의 국제질서를 이끌어온 미국 자신이 세계와 담을 쌓겠다고 나선 것이다. 여기에 절반의 미국인이 찬성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놀랍다. 이는 평평한 세계로 나아가려는 세계화에 대한 역행이며, 자유 평등을 내건 미국 건국 이념과 자신의 역사적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것이다. 박해를 피해 종교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1620년 메이플라워 호에 탔던 102명의 영국 청교도는 미국 건국의 시조이자 최초의 이민이었다.
1776년에는 자유, 평등의 이념을 내세운 미국 독립선언문이 발표됐다. 선언문 초안은 미국의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이 작성했다. 주프랑스 공사를 지낸 제퍼슨은 “누구나 두 개의 조국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자신의 조국이고 또 하나는 프랑스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프랑스가 만들어낸 자유 평등 박애의 이념은 인류가 공유해야 할 보편가치라는 신념을 담고 있다. 미국은 자유와 평등의 이념 위에 건설된 이민자의 나라다. 자유와 평등을 표방했기에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아메리칸 드림이 가능했던 것이다. 프랑스가 미국독립을 열렬히 지원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작금의 반이민 정책과 미국 우선주의는 아메리칸 드림의 위기이자 자유 평등이라는 보편가치에 대한 도전이다.
미국 국적법은 프랑스에서 탄생한 속지주의를 따고 있다. 국적법에는 두 개의 전통이 있다. 하나는 혈통주의라 불리는 독일식 속인주의고, 또 하나는 출생지주의인 프랑스식 속지주의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다수 국가는 속인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가령 속인주의 독일에서는 독일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아도 부모가 독일인이 아니면 국적을 취득할 수 없지만 프랑스는 완전히 다르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교육받은 자는 부모의 인종, 국적을 불문하고 프랑스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
미국의 시민권 개념도 속지주의에서 나왔다. 미국에서 태어나기만 하면 시민권을 준다. 이 때문에 우리사회에서는 원정 출산 같은 사회문제가 야기되기도 하지만 말이다. 속인주의와 속지주의의 차이는 단순히 혈통과 출생지 중 어느 것을 중시하느냐의 차이가 아니라 근본적 가치의 차이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교육받으면 인종, 혈통, 출신에 관계없이 누구나 프랑스인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은 기존의 폐쇄적 민족 개념을 뒤엎는 혁명적인 생각이다.
역사적으로 이런 속지주의를 가장 모범적으로 실천해온 나라가 미국이었다. 덕분에 미국은 인종의 용광로이자 자유 평등의 땅이 될 수 있었다.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오대양 육대주의 다양한 인재들이 자기 꿈과 끼를 발현할 수 있는 기회의 나라였기 때문이다. 세계화를 이끌던 미국이 이제 와서 반이민 정책에 나선 것은 그래서 더욱 충격적이다. 최근 일본과 미국의 우경화, 그리고 인권과 속지주의의 고향인 프랑스 본국에서마저 극우세력이 득세하고 있는 것은 분명 인류 보편가치의 심각한 위기 징후다.
최연구 한국과학창의재단 연수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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