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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권일의 글쟁이 페달] 사이클대회선 약자를 물어뜯지 않는다

입력
2017.02.03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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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바이크 레이스는 마치 우리네 인생살이 같다. 물론 진부한 이야기다. 마라톤도 인생에 비유되고 야구도 인생에 비유되고 골프도 인생에 비유된다. 스포츠에서 인생을 보는 습속은 세계 어디나 비슷하다. 어쨌든 나도 예외가 아니라서 사이클 경기, 특히 그랜드 투어를 보며 종종 인생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거의 3주의 시간 동안 선수들은 자전거를 타고 산을 넘고 물을 건너고 평야를 가로지른다. 편안한 평지를 기분 좋게 달리는가 하면, 나라 잃은 표정으로 피레네 산맥이나 알프스 같은 험준한 고개를 오르기도 한다. 안장 위에서 밥을 먹고, 음료수를 마시고, 소변도 본다. 갑자기 폭우, 폭풍, 폭설을 만나기도 한다. 낙차하기도 하고 장비에 고장이 나기도 하며 선수들끼리의 말다툼, 주먹다짐도 벌어진다. 팀 스태프들은 레이스 내내 차를 타고 따라다니며 선수들이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도록 돕는다. 희노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欲)이 돌발하는 행운이나 불운과 엉켜 재현 불가능한 드라마로 펼쳐지는 곳, 그 시공간이 바로 자전거 경주인 것이다.

자전거 경기를 하다 폭우를 만난 경우
자전거 경기를 하다 폭우를 만난 경우

선수들은 기계처럼 페달만 돌리는 게 아니다. 레이스를 하는 내내 도발하고, 회유하고, 협상하고, 협력하고, 배신한다. 베테랑들 중에서 인망 있는 몇몇 선수들은 펠로톤의 여론을 주도하고 때로 집단행동을 벌이기도 한다. 2015년 투어 오브 오만(Tour of Oman)의 돌발 파업은 그런 집단행동의 적절한 사례였다. 당시 세계최고의 선수들이 다수 참가한 이 대회는 스테이지 5에서 예기치 못한 위기를 맞는다. 원래도 섭씨 35도를 넘나들었지만 이 날은 40도가 넘어가는 살인적인 더위를 기록했다. 설상가상 모래바람이 엄청났다. 높은 기온보다 이 바람이 더 위험했다. 선수들 사이에서 부상에 대한 우려가 번져나갔고 몇몇은 주최 측에 항의한다. 그러나 조직위는 일언지하 일축, 대회를 강행한다. 레이스는 어찌어찌 진행되었지만 날씨는 좋아지지 않았다. 그러자 파비앙 칸첼라라 등 노장 선수들이 불만을 규합, 행동에 나섰다. 레이스 도중 거대한 펠로톤이 일시에 멈춰 선 것이다. 더도 덜도 아닌 파업(strike)이었다. 선수들의 요구는 단순했다. 스테이지 5의 ‘중립화.’ 중립화란 안전한 완주를 위해 해당 스테이지 순위변동을 무효화하는 조치다. 선수들이 똘똘 뭉치자 조직위도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스테이지 5는 중립화되어 선수들은 ‘설렁설렁’ 달렸고 모두가 웃으며 골 라인을 통과했다.

자전거 경기를 하다 파업을 결의하는 선수들(투어 오브 오만)
자전거 경기를 하다 파업을 결의하는 선수들(투어 오브 오만)

자전거 경주가 재미있는 부분이 이런 거다. 다른 스포츠와 달리 집단 내부의 ‘미시정치’가 활발하게 일어난다는 것. 수많은 불문율이 존재하고, 이걸 어기는 순간 집단으로부터 제재를 받는다. 내가 재미있게 생각하는 불문율 내지 격언이 하나 있다. ‘그루뻬또를 절대 공격하지 말라!’ 그루뻬또(gruppetto)는 이탈리아어로 ‘작은 집단’인데, 사이클 경기에서는 컷오프(실격) 없이 완주하기 위해 달리는 후미 그룹, 소위 ‘생존자 그룹’을 가리킨다. 영어로는 오토버스(autobus)라고 한다. 스프린터 타입 선수들은 근육질에 체중이 상대적으로 많이 나가기 때문에 오르막이 많은 스테이지에서 아무래도 쳐지기 마련이다. 오르막에 딱히 약하지는 않지만 그날 하필 컨디션이 좋지 않거나 부상을 입은 선수도 있다. 이들이 서로 기대고 바람을 막아주며 다음 스테이지까지 생존을 도모하는 그룹이 그루뻬또다. ‘그루뻬또를 공격하지 말라’는 말은 쉽게 말해서, 그루뻬또에 묻어가며 득을 보다가 막판에 혼자 성적 올려보겠다고 치고 나가거나 갑자기 속도를 내며 그루뻬또의 기력을 소모시키는 짓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이건 상당히 엄격하게 지켜지는 불문율로, “기본원칙(a cardinal rule)”이라고까지 표현되고 있다. 즉, 이 룰을 누군가 어기면 반드시 보복 당한다.

자전거 경기를 하다 폭설을 만난 경우
자전거 경기를 하다 폭설을 만난 경우

얼핏 보기엔 참 이상한 이야기다. 1초라도 빨리 달리는 자가 이기는 게 레이스이고, 그것이야말로 레이스의 존재 이유가 아닌가? 경기규칙이 허용하는 한, 선수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빨리 달리면 그만이다. 뒤에 쳐진 루저들을 왜 신경 써야 하는가? 오히려 그런 짓이야말로 정정당당한 실력경쟁을 가로막는 악습이 아닌가?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루뻬또를 공격하지 마라”는 나름의 정합성을 갖춘 집단적 지혜다. 여기엔 얄미운 놈 응징한다는 응보적 감정이 당연히 포함될 테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저 원칙의 가장 유익한 기능은 승자독식 경쟁의 부작용을 완화시키는 것이다. 쉽게 말해 1등 경쟁과 무관한 경우엔 경쟁 압력을 줄임으로써 불필요한 자원의 손실과 위험을 줄일 수 있다. 후미에서의 경쟁은 가장 탁월한 자를 가리는 게 아니라 꼴찌를 확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격화되어봐야 득 될 게 별로 없다. 오히려 다음 스테이지에 가면 뛰어난 실력을 발휘할 이들이 꼴찌가 안 되려고 무리 하다가 패자부활의 기회조차 놓치게 될 수 있다. 우리가 경쟁하는 이유는 서로의 탁월함을 겨루고 더 연마하기 위해서이지 좌절과 모멸을 누군가에게 덮어씌우기 위해서는 아닌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면 자전거 경주가 어쩌면 실제 우리 삶보다 더 깊은 맛을 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각자도생이 유일한 생의 원리인 지금, 약자끼리 서로를 짓밟고 물어뜯는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윤리가 바로 이 말 아닐까. “그루뻬또 함부로 차지 마라, 우린 모두가 생존자다.”

프리랜스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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