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한라산은 유독 사람을 끌어당긴다. 중턱부터 구름에 가렸던 한라산이 어느 날 모습을 드러내면 분명한 경계를 지은 상고대를 연출한다. 정상부터 차곡차곡 눈이 쌓이기 시작해 검은 산자락이 하얗게 덮이면, 내 눈은 끊임없이 흰 산을 바라보며 이제 올라야 한다는 본능 같은 열망이 생기는 것이다.
새벽 첫 차를 타고 성판악에 내려 등반 준비를 한다. 어둔 겨울 새벽의 산길을 헤드랜턴에 의존해 오르는 사람들도 많지만, 눈의 어렴풋한 빛만으로 길을 구분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스름이 깔리고 산새소리가 들리며 빛은 완연해진다. 발에 재촉하는 마음을 약간 담아 가볍게 한 시간 반 정도를 올라 속밭대피소에 이른다. 다시 조금 버거운 걸음으로 사라오름을 거쳐 진달래밭대피소에 도착. 따뜻한 컵라면 하나로 몸을 덥히며 백록담까지의 최종구간을 준비한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에 잠시 발을 멈춘다. 검은 돌이 쌓인 가파른 산길에서 뒤를 돌아보니 구름이 시선 아래로 깔려 있다. 그 위로 깊이를 알 수 없는 푸른 공간에 강렬한 볕이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비 오듯 흘러내리는 땀이 싸늘한 공기에 식어 차갑게 자취를 만들었다. 산은 기이하고 신비롭다. 발 아래 구름은 성취감을 주고, 앞의 가파른 길은 의무를 부여한다. 몸은 힘들지만 어떻게든 올라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분화구의 능선을 오르는 일은 힘들다. 쏟아지듯 떠미는 바람은 헉헉거리는 숨마저도 잠식한다. 감정과 버거움마저 진공으로 몰아넣는다. 기계적으로 움직인 몸이 어느새 백록담에 다다른다. 살얼음이 조금 얹힌 눈 쌓인 백록담을 보는 순간, 내 숨과 감정, 버거움은 진공에서 해방돼 1950m라는 높이의 산 정상에 존재함을 깨닫게 된다. 이어 다가오는 것은 성취감, 차가운 땀방울, 그리고 허기. 이렇게 올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는구나. 차갑게 넘어가는 물 한 모금을 느끼며 숨을 고른다.
제주에 들어와 4번 백록담을 마주했지만, 오를 때마다 구름에 숨어 좀처럼 자신의 완연한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오죽하면 3대가 덕을 쌓아야 그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말까지 있을까. 이번 산행에서 비로소 그 또렷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웅장한 백록담뿐 아니라 지나온 저 아래 능선들과 중간에 보이는 사라오름의 눈 고인 모습까지 말이다. 내리쬐는 빛은 눈 아플 정도로 찬란했고, 발 아래 구름은 점점 걷혀 멀리 성산일출봉과 우도가 보였다. 관음사로 내려 오는 길 옆으로 담 넘어 보는 듯한 백록담의 은근함과 맑은 날 멀리 제주시 풍경 앞으로 펼쳐진 장구목의 웅장함 모두 즐거움이었다. 아파 오는 무릎과 달리 걸음마다 펼쳐진 풍경은 풍성하고 만족스러웠다. 그렇게 2016년의 마지막 날을 보내고 2017년을 준비하고 있었다. 모두들 이제껏 그러했듯이 새해에도 여일하게 버티고 견뎌내시길.
전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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