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안락사 반대 원칙주의자
“우리가 추구하는 대법관의 모습”
새로운 ‘보수의 대변자’로 지명
민주당 “잘못된 선택” 강력 반발
필리버스터 등 표결 저지 검토
“Textualist(원문주의자), Originalist(원전주의자).”
31일(현지시간) 닐 고서치(50) 콜로라도주 연방항소법원 판사가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으로부터 연방대법관으로 지명되자 미국 언론들이 일제히 쏟아낸 말이다. 법조문과 원칙을 중시하는 고서치가 종신직인 대법관에 낙점되면서 지난해 보수성향의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 사망 후 4대4로 좌우균형을 지탱해온 연방대법원의 이념 색채는 급속히 우클릭하게 됐다. 동시에 트럼프 행정부가 의회, 내각에 이어 미 사법부의 정점인 대법원마저 장악하면서 미국 사회의 보수 성향은 더욱 짙어질 전망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오후 8시 미 전역에 TV 생중계된 발표를 통해 “뛰어난 법 능력과 정신, 대단한 충성심을 갖춘 고서치 판사를 연방대법관에 지명한다”고 밝혔다. 그는 “고서치는 우리가 추구하는 대법관의 모습과 흡사해 초당적 지지를 받을 것”이라며 “그의 결정이 수백년, 혹은 영구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굳건한 신뢰를 나타냈다.
고서치 지명자는 컬럼비아대와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 로스쿨 시절엔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함께 공부했다. 1993년 바이런 화이트와 현 연방대법관인 앤서니 케네디 판사의 서기로 법조계에 입문한 그는 로펌과 법무부를 거쳐 2006년 조지 W. 부시 정부에서 콜로라도주 연방항소법원 판사로 지명됐다. 고서치 지명자는 1991년 클래런스 토머스 대법관(당시 43세) 이래 최연소 대법관 지명자이기도 하다.
대법관 9명으로 구성된 미 연방대법원은 지난해 2월 ‘보수의 대변자’ 앤터닌 스캘리아 대법관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1년 가까이 진보 4명(스티븐 브레이어, 엘레나 케이건, 소니아 소토마요르,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보수 4명(존 로버츠 대법원장, 클래런스 토머스, 새뮤얼 알리토, 앤서니 케네디)의 팽팽한 이념 지형을 유지해 왔다.
당연히 트럼프 입장에선 종신직인 대법관이 갖는 파급력을 감안해 보수 입장을 대변할 ‘제2의 스캘리아’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워싱턴포스트에 따르면 트럼프는 일찌감치 대선 후보 시절부터 대법관 후보 21명을 정해 놓고 옥석 가리기에 공을 들인 것으로 알려졌다.
고서치의 이력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그를 선택한 이유가 금세 드러난다. 그는 연방정부의 권력보다 주정부의 권리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정통 보수주의자다. 사안별로도 낙태, 조력자살, 안락사 등에 반대하는 등 보수 가치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고서치는 2006년 출간한 저서 ‘조력자살과 안락사의 미래’에서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가치를 지니며 타인이 인위적으로 인간의 존엄에 개입해서는 안된다”며 안락사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2013년엔 기독교계 공예품 업체 하비라비 등이 피임 비용을 지원하는 건강보험을 제공할 수 없다며 제기한 소송에서 사측 손을 들어 줘 ‘오바마케어(건강보험개혁법)’에 비판적 견해를 내비치기도 했다. 고서치 스스로도 이날 지명 자리에서 “‘법의 사자(lion of law)’인 스캘리아 대법관을 계승하게 돼 영광이다. 미국 법률과 헌법의 충직한 공복으로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대법관 인준까지는 험로가 예상된다. 민주당은 벌써부터 철저한 검증을 벼르고 있다. 낸시 펠로시 민주당 하원 원내대표는 “고서치 지명은 ‘잘못된 선택’”이라고 단언했다.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도 “노동자보다 기업을 옹호하는 고서치에 심각한 의구심이 든다”며 “그가 대법관으로서 적합한지 광범위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민주당은 ‘필리버스터(합법적 의사진행 방해)’를 통해 인준 표결을 저지하는 방안을 고려하고 있다. 지난해 스캘리아 대법관 사망 뒤 공화당이 중도성향의 메릭 갈랜드 지명자의 인준을 무산시킨 바 있어 명분은 충분하다는 판단이다. 필리버스터를 막으려면 상원의원 100명 중 최소 60명이 동의해야 하는데, 현재 공화당 의석(52석)으로는 저지가 불가능한 점도 호재다. CNN은 “민주당 지도부가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반이민 행정명령 등 주요 이슈에 소극적으로 대처해 진보진영으로부터 상당한 압박을 받고 있다”며 강경 대응에 나설 것임을 시사했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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