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출판계에서 죽은 저자가 다시 호출되는 경우는 두 가지로 요약된다. 아직 판권이 유효한, 팔리는 작가의 저작권을 가진 출판사가 주도해 만드는 잔치이거나 ‘문학사적 의미’를 획득한 유명 작가의, 그 ‘의미’를 더 공고하게 만드는 학계의 학술대회다. 이 부박한 공식에서 벗어난 작가가 있다. 다음달 2일 타계 10년을 맞는 시인 오규원(1941~2007)이다.
자신의 시론을 ‘두두시도 물물전진(頭頭是道 物物全眞 사물 하나하나가 도이고 하나하나가 전부 진리다)’으로 요약했던 그는 관념에서 벗어나 ‘날(生) 이미지’를 사물에 돌려주고자 안간힘을 썼다. 한국 전위시의 최첨단에 섰던 그는 뛰어난 편집자이기도 했다. 출판사 문학과지성사의 초기 대표 소설인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의 표지 장정을 하고 시집 총서 ‘문지 시인선’ 표지 포맷을 지금 형태로 만들었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에 재직하면서 쓴 ‘현대시작법’은 한국 문인들에게 ‘수학의 정석’ ‘성문기본영어’ 같은 고전으로 통한다.
“드물게 자신의 시론을 가진, 시와 시론과 삶이 일치했던”(이원 시인) 시인을 기리는 잔치가 풍성하게 열린다. 그의 기일에 맞춰 첫 시집 ‘분명한 사건’(문학과지성사)이 복간되고 시인 48명이 쓴 추모시집 ‘노점의 빈 의자를 시라고 하면 안되나’가 500부 한정판으로 발간된다. 그가 생전 찍은 1,000여 개 컷 중 56점을 모아 사진집 ‘무릉의 저녁’(눈빛)이 발간되고 그 실물이 다음달 26일까지 서울 종로구 청운동 류가헌에서 전시된다.
‘오규원 10주기 준비위원회’ 이름으로 모인 수십 명의 제자들이 이 모든 걸 준비했다. 박형준 장석남 등 어느덧 걸출한 중견 시인으로 자리매김한 이들은 1년 간 십시일반 기금을 모으고 행사를 준비했다. 전시 첫날인 31일 류가헌에서 만난 조용미(55) 이원(49) 서정학(46) 최규승(54) 시인과 홍소영 세컨드뮤지엄 대표, 다섯 명의 제자는 저마다 ‘오규원의 적자’를 자처하며 시인을 기억했다.
“82학번 첫 제자”라며 후배들을 제압한 조용미 시인은 “갓 스무 살 넘어 공부하는 제자한테 이런 식의 교수법이 좋은가 싶을 정도로 혹독했던 스승”이라고 회상했다. “그때 그게 행운인 줄 몰랐죠. 정서와 관념에 매몰되지 않고, 사물을 사물로 보는 냉혹한 시선을 알려 주셨으니까요.”
“수위 조절 좀 하라”며 안절부절 하던 87학번 이원 시인은 이야기가 무르익자 “A4용지 4장으로 쓴 시를 수업 때 줄이고 줄이다 12줄로 남았다”고 고백했다. “가족사를 커밍아웃한 시였는데, 선생님이 ‘자네 감정이 과한 것 같지 않나? (불필요한 부분을)내가 줄일까? 자네가 줄이겠나?’ 하시는 거에요. 자존심에 제가 줄인다고 하고 보니 그때 (감정과잉이)보이더라고요.”
옆에서 듣던 97학번 최규승 시인이 “(오규원 선생 수업에서)자기 시가 1줄이라도 남은 사람이 그날 술을 사는데 12줄이나 남았나”라며 감탄한다. “저한테 선생님은 ‘간지 나는 시인’이었죠. 당시 다른 시들은 ‘인생이 어떤 거고 이렇게 살아라’ 같은 훈계이거나 아름다운 자연에 대한 얘긴데 선생님 시는 달랐거든요. 아름다움이 그런 곳에 있지 않다는 걸 보여준 거죠.”
‘91학번 동기’로 이번 한정판 추모시집을 만든 홍소영 대표와 서정학 시인은 10년 연애 끝에 2001년 결혼한 부부이기도 하다. 홍 대표는 “시평은 냉정하고 정확한데 비해 사적으로 만나면 너무 따뜻했던 분”으로 오 시인을 기억했다. “선생님을 단둘이 따로 뵌 적이 있었는데, 그때 글 계속 쓸 생각이냐고, 부모님 뭐하시냐고 하시더라고요. 어떤 의미냐면 글을 쓰려면 경제적 활동을 오랫동안 못할 수도 있잖아요. 제자들 경제상황까지 챙기신 건데 그런 따뜻한 면이 있구나 생각했죠.”
이 모든 상찬에도 불구하고 고독이 특기이자 체질인 이들이 한데 뭉쳐 ‘기획’하고 ‘활동’하기는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조용미 시인은 “오규원의 문학적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오규원을 현재형으로 기억하는 방식”이라고 말했다. “타계한지 10년이 지났지만 시를 지금 읽어도 생생하게 살아있죠.”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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