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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길 위의 이야기] 부끄러운 날들

입력
2017.01.3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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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친구가 말했다. “얼마 전에 TV를 보는데 나이 지긋한 부부가 나왔거든. 남편한테 물었어. 아내의 장점이 뭐냐고.” “뭐라던데?” 친구가 대답했다. “유치하지 않아서 좋대.” 나는 까르르 웃었다.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아내한테도 물었어. 남편의 장점이 뭐냐고.” “뭐래?” 친구가 또 대답했다. “의리가 있대. 또 정의롭대.” 이번에는 웃을 수 없었다. 대단하다고 칭찬하는 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나는 그 노부부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서로를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어렸을 적부터 나는 이상형을 묻는 사람들의 질문에 망설이지도 않고 “의리 있는 남자요!” 외치곤 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여튼 너는...” 하면서 낄낄거렸다. 사실 의리 있는 남자보다 정의로운 남자를 더 원했는지도 모르지만 그건 너무 비현실적인 일이라 생각했다. 가끔 만나는 사람들에게 의리를 느끼고 정의로움을 느끼는 건 흔할 수 있겠으나 수십 년 함께 살며 속내를 다 보여주면서 끝끝내 그런 평가를 듣는 건 얼마나 거룩한 일일까. 나는 아주 가끔 만나는 사람들에게조차 내 유치함을 속절없이 매일매일 들키고 마는데. 나이가 들어가면서 부끄러움의 기준이 달라진다. 이전에는 다른 이들보다 잘나지 못해서 부끄럽고 잦은 실수가 부끄러웠다면 이제는 부끄러운 일에 후딱후딱 사과하지 못했던 일이 부끄럽고 타인의 부끄러움에 너그럽지 못했던 일이 부끄럽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오늘부터 다시 살아도 이십 년쯤 후에 “넌 유치하지 않고 의리도 있는 데다 정의로워.”라는 말을 들을 것 같지도 않아서, 그것도 부끄럽고 말이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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