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27일(현지시간)‘반(反) 이민 행정명령’서명의 후폭풍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테러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로 국민의 자유로운 미국 입국이 불가능해진 7개 이슬람 국가는 물론 영국, 프랑스, 독일 등 미국의 우방국들이 일제히 인종 다양성을 뿌리부터 부정하는 행정명령 비난에 가세했다. 취임 후 고작 열흘여를 보낸 트럼프 대통령이 그 사이 전 세계를 ‘적’으로 돌려세워 버린 것이다.
반이민 행정명령 여파는 미국을 넘어 국제사회를 혼란에 빠져들게 했다. 비록 트럼프 대통령이 대선 후보시절부터 무슬림국가 출신 이민자에 대한 배타적인 정책을 펼치겠다고 공공연히 밝혀왔지만 행정명령으로 이런 우려가 현실화하면서 충격파가 적지 않은 상황이다. 특히 미국과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자유진영을 이끌어 온 서방 우방국들에 파장이 컸다.
테리사 메이 영국 총리는 행정명령 서명 당일 미국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과 찰떡 공조를 과시했으나 “미국의 반이민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당초 메이 총리는 행정명령 논평을 3차례나 거부하다 국내 반발에 직면하자 반대 입장으로 돌아섰다. 29일 BBC에 따르면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트럼프 국빈 초청 계획을 취소해야 한다는 영국인들의 온라인 청원 운동에 사흘 새 100만여명이 동참했다. 제레미 코빈 노동당 대표도 “트럼프는 영국에서 환영 받을 수 없다”고 전날 트위터에서 날을 세웠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도 30일 베를린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테러에 단호하게 대응하더라도 특정 신념을 지닌 모든 이들에게 혐의를 두는 것은 정당화할 수 없다”며 거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는 전날 “다양성은 우리의 강점”이라는 글을 남겨 미국과 달리 난민 수용 정책을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또 이란 정부가 미국인의 자국 입국을 금지하는 보복 조치를 거론하는 등 제재 대상으로 지목된 국가들은 미국에 ‘강 대 강’으로 맞설 태세를 공고히 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의 반 이민정책이 전모를 드러내면서 우군이 되어야 할 공화당 내부에서도 비판 목소리가 거세지고 있다. 트럼프 집권 4년 이후를 생각해야 하는 공화당 지도부 입장에선 일찌감치 소수인종 유권자들의 다음 대선 표심을 계산해야 하기 때문이다. 공화당 중진인 존 매케인과 린지 그레이엄 상원의원은 29일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행정명령이 테러와의 싸움에서 ‘자해’가 될까 두렵다. 안보를 강화하기 보다 테러범 모집을 부추길 것”이라고 말했다. 미치 매코넬 상원 원내대표 역시 “종교를 테스트 대상에 올려 놔서는 안된다”고 밝혔다. 행정명령에 반대 의사를 공개 표명한 공화당 인사는 줄잡아 10여명에 이른다. 미 시사주간 타임은 “당정의 밀월 기간이 일주일 만에 종지부를 찍을 것 같다”며 “공화당이 트럼프에게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미국을 대표하는 글로벌 기업들은 정부의 인종주의적 처사에 대놓고 반기를 들었다.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최고경영자(CEO)는 이날 “직원들이 혼란의 시기를 헤쳐 나갈 수 있도록 앞으로 5년 간 전 세계에서 난민 1만명을 채용하겠다”고 선언했다. 트럼프의 인종주의를 정면 반박하는 동시에 그가 그토록 원했던 ‘일자리 창출’을 약속하는 중의적 제스처이다. 구글은 직원 모금과 회사가 보탠 400만달러로 이민자ㆍ난민구호기금을 조성해 미국 시민자유연맹(ACLU), 이민자 법률지원센터 등 4개 단체에 기부하기로 했다.
법적 다툼 및 정치 공방과 별개로 현장의 혼란은 두드러지는 양상이다. USA투데이는 “시카고 등 일부 지역 국제공항에서는 행정명령 대상자의 입국이 전면 금지된 반면, 샌프란시스코 등에서는 구금 여부가 결정되지 않았다”며 “주요 공항마다 혼돈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미 국토안보부에 따르면 행정명령이 발효된지 이틀 만에 미국 입국이 거부되거나 미국행 항공기 탑승이 불허된 외국인은 375명에 달한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백악관의 부인에도 영주권자가 행정명령의 적용 대상인지를 놓고 혼선이 벌어지고 있다”며 “미국사회 전역으로 확산된 반 이민 반대 시위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예상했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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