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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로하는 추억의 사진첩…스페인 쿠엥카

입력
2017.01.27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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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루엘에서 쿠엥카로 가는 N-420 국도는 유채꽃밭의 절경이 몸을 휘감았다. 그 꽃 내음이 뒤엉켜 따라오던 자리의 끝, 쿠엥카(Cuenca)다. 언젠가 모든 걸 놔버리고 싶을 때 열어보고 싶은 위로의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테루엘-쿠엥카를 잇는 W형 국도에 펼쳐진 유채꽃밭. 멀리 온 나그네의 피로도 이곳에서 잠든다.
테루엘-쿠엥카를 잇는 W형 국도에 펼쳐진 유채꽃밭. 멀리 온 나그네의 피로도 이곳에서 잠든다.

에콰도르 쿠엥카 vs 스페인 쿠엥카

구글 검색창에 ‘쿠엥카’로 이미지를 검색하면 16~17세기 유럽이 쏟아져 나온다. 에콰도르의 쿠엥카와 스페인의 쿠엥카, 전세계인이 두 도시를 열심히 기록한 흔적이다. 16세기 신대륙 정복을 가속화했던 스페인은 에콰도르 중남부, 해발 2,500m 고산 지대에 이르러 본국의 도시 이름을 그대로 따 쿠엥카라고 명명했다. 에콰도르의 쿠엥카는 남미라기보단 유럽이라 부르는 편이 옳다. 누군가 길을 물으면 알려줄 수 있을 정도로 길의 구획이 잘되어 있고, 남미의 오랜 숙명인 쓰레기가 보이지 않아 생경하며, 다소 온건한 날씨 아래 태평해진 현지인 얼굴엔 부티가 흐른다. 요상한 건 에콰도르 쿠엥카가 중세 건축물로 콤팩트한 유럽을 떠올리게 한다면, 스페인 쿠엥카는 자연을 덕으로 삼는 후미진 변방의 느낌이 강하다는 점이다. ‘강들의 합류로 만들어진 분지’란 뜻을 가진 쿠엥카. 후카 강(Ríos Júcar)과 우에카르 강(Ríos Huécar) 사이의 협곡을 타고 좁은 언덕으로 촘촘히 집들이 들어선 송곳 같은 전망, 그 모든 건 온전히 스페인 쿠엥카의 것이다.

쿠엥카의 맛. 시·공간감을 모조리 잠재우는 풍경이다.
쿠엥카의 맛. 시·공간감을 모조리 잠재우는 풍경이다.
전망대에서 이어지는 산 페드로 내리막길(Calle de San Pedro)의 요충지, 마요르 광장.
전망대에서 이어지는 산 페드로 내리막길(Calle de San Pedro)의 요충지, 마요르 광장.
전망대를 향해 날개 단 듯 달리는 쾌적한 빨간 버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모두 명석이다.
전망대를 향해 날개 단 듯 달리는 쾌적한 빨간 버스. 왼쪽이든 오른쪽이든 모두 명석이다.

맛깔스런 음식을 과식하고 소화하듯, 쿠엥카의 여행법

“바로 저기, 저 보이는 곳에 데려다 줘!”

갓 신시가지에 들어선 차 안에선, 절벽에 세워진 구시가지의 풍경을 앞두고 폭죽처럼 목소리가 터졌다. 앞면 유리로 반 토막 난 전망임에도 저기로 데려다 달라고 애걸복걸하다가 가까이 다가서자 이내 사라지는 전망에 뾰로통해진 상황이었다. 차 한대 변변히 몸 붙일 곳 없는 이곳의 주차 대란은 일생일대의 도전이자 그럴듯한 핑계였다. ‘그럼 다시 한번 돌아볼까?’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잇는 미끄덩한 길을 돌고, 돌고, 또 돌았다.

쿠엥카는 크게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가르마를 타는, 스스로 내비게이션이 되기 좋은 도시다. 신시가지엔 유행 지난 부티크로 채워져 별 볼 일 없는 반면, 구시가지엔 모든 볼거리가 우글우글 몰려 있다. 구시가지는 수직형 상승 곡선을 탄다. 우리식이라면 달동네다. 이곳을 여행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맛있는 음식을 포식하고 소화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일단 신시가지에서 L1이나 L2 버스를 타고 언덕의 최고점으로 진격해 하이라이트 전망을 가장 먼저 맛본다. 그 어마어마한 절경에 에너지를 받아 신나게 산 페드로 길을 따라 내려간다. 갸우뚱한 마요르 광장(Plaza Mayor)에서 대성당을 비롯해 거장 엘 그레코 작품을 선보이는 디오세사노 박물관(Museo Diocesano), 우에카르 강 절벽에 간신히 걸려 있는 16세기 카사스 콜가다스(Casas Colgadas)를 들르며 쿠엥카를 몸 속 깊이 흡수시킨다. 이후 광장으로부터 창자처럼 꼬이고 꼬인 골목에 걸음을 내디디며 집으로 간다. 여행의 끝은 소화가 잘된 듯 쾌청하고 가뿐하다.

가톨릭사제단이 운영한 중세 학교였던 느낌을 살린 호텔, 포사다 산 호세(Posada San José)
가톨릭사제단이 운영한 중세 학교였던 느낌을 살린 호텔, 포사다 산 호세(Posada San José)
저마다 다른 얼굴과 때깔의 골목들. 쿠엥카는 골목의 축제다.
저마다 다른 얼굴과 때깔의 골목들. 쿠엥카는 골목의 축제다.
거의 내려왔다 싶을 때도 방심하지 말라. 전망은 언제나 몸을 꼿꼿이 세운 도미노 집들.
거의 내려왔다 싶을 때도 방심하지 말라. 전망은 언제나 몸을 꼿꼿이 세운 도미노 집들.

쿠엥카의 키워드, 전망과 골목의 속삭임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과 끝은 존재하지 않는다. 탑승한 L1버스가 전망대인 종점에 닿자 여행은 곧 시작되었다. 사실상 이대로 여행의 끝이어도 좋을 것 같다. 종점 앞 쿠엥카의 풍경은 여러 전망대 중에서도 가장 원시적이다. 기암 절벽에서 잉태한 듯 집들이 용솟음치고, 우에카르 협곡 위로 파라도르 호텔(Parador Hotel)과 구시가지를 연결하는 날씬한 산 파블로 다리(Puente de San Pablo)가 아슬아슬해 보인다. 협곡 구석구석은, 길이 부드러운 곡선의 띠를 두르며 연결됐다. 감정이 이끌어 가까이 더 가까이 가는데, 이를 막는 이성적인 주의 표시는 물론 바리케이드 하나 없다. 아찔하고 아득하다. 한편 풍경으로부터 멀찍이 섰을 때, 여행자의 뒤통수만 보는 풍경도 흥미롭다.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없다. 모두 전망에 시선을 꽂고 눈으로 볼 수 있는 120도 각도를 모두 써버렸다. 하긴 이 풍경은 어떤 언어로 조합하기에도 부질없는 것이었다.

쿠엥카의 골목을 하루 동안 모두 섭렵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철저한 방황을 전제로 갈기갈기 찢어져 있는 이유다. 예상한 길로 가려다가 딴 길로 새고, 잘못 들어섰거니 하면 원하던 그 길이 나왔다. 골목은 비좁고 건축물은 서로 만날 듯 허리를 굽히거나 발코니가 툭툭 튀어나와 내내 거인국에 사는 소인(小人)이 된 판타지를 경험한다. 쨍쨍한 햇볕 아래 큰길에서 들어선 골목은 철저한 그림자 아래다. 햇빛과 어둠 사이를 숨바꼭질하는 사이, 언제나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길을 따라가면 그림 같은 풍경이 걸려 있었다.

엉켜버린 스텝을 밟으며 가까스로 내려왔다. 한없이 아둔한 자신을 들켜버릴 때, 인생이 안쓰럽기 그지없을 때,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을 때 쿠엥카의 전망과 골목 풍경을 열어보곤 했다. 여러 갈래의 길, 그 속에 내 길은 어디 있느냐고 물으면서.

강미승 여행 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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