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27
연합군과 나치 주력부대가 벌지 전투의 전장에 묶여 있던 사이 소련 붉은 군대는 거침없이 폴란드로 진격했다. 그리고 1945년 1월 27일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진주했다. ‘0년-현대의 탄생, 1945년의 세계사’를 쓴 이안 부루마는, 바로 그 해 그날 그 자리에서 인류의 ‘현대’가 비로소 시작됐다고 주장했다. 유럽의 복지국가와 국제연합 미국식 민주주의 일본 평화주의 유럽연합이 잉태됐고, 러시아와 동유럽의 공산독재와 냉전이 비롯됐다.
그날 아우슈비츠에는 소련군의 진격속도가 워낙 빨라 나치가 미처 ‘파괴’하지 못한 집단학살의 증거들, 수용소 시설과 유대인 등 수용 생존자 6,000여 명이 남아 있었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는, 읽는 것만으로도 흠씬 두들겨 맞은 듯 기진하게 하는 책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고 썼지만, 그도 “그러나 그 시간, 극한 상황에서 구원을 받는 성서의 모든 일화들이 바람처럼 모두의 머릿속을 스쳤던 것은 사실이다”라고 고백했다. 그들 개개인의 생사와 무관하게 어쨌건 인류는 그 생지옥에서, 구원처럼 현대를 일구어냈다.
영국군이 그 해 4월 15일 최초로 해방시킨 나치 강제수용소는, 안네 프랑크가 희생된 독일 본토의 ‘베르겐 벨젠 수용소’였다. 서구 언론에 보도된 최초의 강제수용소 이미지가 거기서 나왔다. 부루마가 소개한, 그 곳 벨젠 수용소에서 일어난 립스틱 에피소드는 레비가 꿈꾸던 구원의 실마리 같기도 하고, 현대가 태어나는 작은 알레고리 같기도 하다.
4월 말 어느 날 음식과 의약품 부족으로 허덕이던 수용소에, 어떤 착오로 상당량의 립스틱이 배달됐다. 영국 구급차부대 한 장교의 회고. “시트도 없는 침대에 잠옷도 없이 누워 있던 여성들도 주홍색 립스틱을 칠했고, 어깨 위에 걸친 담요 외에는 아무것도 없이 헤매고 다니던 여성들도 주홍색 립스틱을 칠했다. 마침내 누군가가 이 수용자들을 다시 인간으로 만드는 뭔가를 해냈다.(…) 립스틱은 그들에게 인간성을 다시 돌려줬다.”
끝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아우슈비츠의 레비처럼, 립스틱을 대신할 무엇도 찾지 못한 이들도 물론 숱하게 많았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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