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킹’에서 배우 정우성(43)은 ‘원톱’ 주연이 아니다. 후배 조인성에게 크레딧 윗자리를 내주었다. 정우성은 영화가 시작하고 40여 분이 지나서야 등장한다. 그것도 호텔의 펜트하우스에서 환락을 즐기는 비리검사 한강식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멋진 모습을 기대했던 팬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그가 연기하는 한강식을 보고 있노라면 현재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들었다 놨다 한 검사들이 떠오른다. ‘공짜 주식 대박’ 파문의 진경준 전 검사장이나 ‘국정농단’의 핵심인물로 거론되는 검사출신 우병우 전 민정수석이 어른거린다.
최근 한국일보와 만난 정우성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국이 이렇다 보니 검사 출신 인물들을 떠올리는 게 당연하다”면서도 “2년 전 영화를 찍을 때만 해도 그들을 염두에 둔 캐릭터가 아니었다”라고 말했다. “상당한 우연”이 작용했다는 얘기다.
정우성은 박근혜 정부가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에 이름이 올려진 배우다. 그렇다 해도 정우성이 비리 검사를 연기하고, 사회의 부조리에 대해 비판하는 영화에 출연하는 건 좀 다른 얘기다. “시나리오를 보고 최고의 권력기관 중 하나인 검찰을 풍자하거나 희화화한 부분은 굉장히 용기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영화인으로서 이러한 것을 영화적으로 풀어가는 게 권리이자 의무라고 여겨요. 그런 마음에서 ‘더 킹’을 선택했고요.”
정우성은 ‘더 킹’에 조인성이 이미 캐스팅됐다는 것을 알고서도 출연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멋진 역할은 이미 20대 젊은 시절에 많이 했다”며 “그때도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영화를 좋아하긴 했지만 달콤한 영화들이 더 몰렸다”고 말했다.
정우성은 ‘더 킹’에서 거침없이 망가진다. 검사장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지닌 한강식이 자신을 보좌하는 양동철(배성우), 박태수(조인성) 검사와 함께 댄스곡에 맞춰 춤을 추는 장면에선 웃음이 절로 나온다. ‘더 킹’의 한재림 감독은 90년대 대표 인기곡인 자자의 ‘버스 안에서’와 클론의 ‘난’을 시나리오에 직접 써넣었다. 강렬한 눈빛과 표정은 정우성의 전매특허이기에 연습이 필요 없었지만 춤은 달랐다고. 그는 “일단 노래를 많이 듣고, 혼자 숙소에서 연습도 했다”고 귀띔했다. 또 한강식이 극한 상황에 몰리자 맥없이 무너지는 모습에선 정우성의 아이디어가 보태졌다. 대본에는 없던 손수건을 준비해 눈물을 훔치는 장면이다. 관객들의 쓴웃음이 객석 곳곳에서 튀어나올 만 했다. “작정하고 준비한 손수건”이라는 게 정우성의 설명이다.
범죄 조직의 리더 제임스로 출연했던 영화 ‘감시자들’(2014)들 이후 정우성의 행보는 조금 달라졌다. 멜로영화 주인공의 색채를 지우고 개성 있는 악역에 더 가까워졌다. 순진한 여인 덕이(이솜)를 유혹한 뒤 외면하는 교수 학규(‘마담 뺑덕’)가 되거나 악덕시장 성배(황정민)의 뒷일을 봐주는 비리 형사 도경(‘아수라’)이 되기도 했다. 그는 “배우로서 연기의 폭을 넓히고 싶은 욕구가 커진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 청춘스타에서 성격파 배우로 향하는 기로에 선 듯 보였다.
“최근에 가장 많이 드는 생각이 ‘좋은 선배가 되자’입니다. 나이를 잘 먹어야겠다고 느껴요. 젊은 후배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사람이 되고 싶어요. 관객과 더 많이 소통할 수 있는 (의식 있는)작품들을 하라고 강요할 순 없지만, 그런 분위기를 조성해 주는 것도 선배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일까. 그는 요즘 용기 있는 행보로 영화팬들의 응원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지난해 ‘아수라’ 무대인사 때에는 “박근혜 나와!”라며 ‘국정농단’사태를 꼬집어 깜짝 놀라게 했다. 정우성은 “정치적 이념을 얘기하는 게 아니라 바람직한 삶에 대한 상식을 얘기하는 것”이라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시대라 억울한 것 아니겠나”고 목소리를 높였다. 현 시국이 꽤 아픈 듯 보였다. 그는 “촛불집회는 참여한 적 없지만 매주 토요일이 되면 뉴스에서 생중계되는 시민들의 행렬을 지켜본다”며 “정유년 새해에는 더 희망적이고 밝은 미래를 맞이할 수 있을까요?”라고 반문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