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청ㆍ불면증 등 불안감 호소
“지자체 심리상담 한계” 지적
지난해 말부터 2주 가량 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살처분 작업에 나선 세종시 공무원 A씨는 닭의 비명이 환청으로 들려 불면증에 시달렸다.
A씨는 “업무 시간에도 살아있던 닭을 살처분 했던 일이 떠올라 휴가를 내고 쉬어도 봤지만 소용 없었다”고 말했다. 결국 A씨는 세종시가 진행한 심리상담에서 외상후스트레스 장애 위험군 진단을 받았다.
충남 천안시에서 AI 살처분 작업 지휘에 나선 시 간부 B씨는 지난해 말 탈진과 어지럼증 등 과로 증세로 입원 치료를 받았다. 체력은 고갈됐고, 살아있는 닭 수만 마리를 죽였다는 죄책감과 악몽으로 정신마저 쇠약해졌다. B씨는 결국 명예퇴직을 신청하고 수 십 년 간의 공직 생활을 접었다. 같은 과 직원 C씨도 같은 시기 과로로 쓰러져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사상 최악의 AI가 전국을 휩쓴 가운데 살처분 등에 투입된 공무원과 작업자들이 심각한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살아있는 생명을 처분했다는 죄책감에 환청, 불면증 등에 시달리는가 하면 심리적 혼란을 견디지 못해 퇴직하는 사례까지 나오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심각한 AI피해를 입은 경기도는 살처분 종사자 280명을 대상으로 심리상담을 진행한 결과 32명이 고위험군, 26명이 위험군으로 분류됐다고 25일 밝혔다. 위험군으로 분류된 이들은 심리치료를 통해 어느 정도 상태가 호전됐지만 고위험군은 추가 검사 및 치료를 받고 있다.
전북도도 AI발생지역(고창, 김제, 부안, 정읍)을 순회하며 160여명을 대상으로 심리상담을 진행해 149명에 대한 심리 치료를 마쳤다. 하지만 11명은 여전히 심한 심리적 불안을 호소해 상담과 치료를 병행하고 있다.
AI 피해가 컸던 충북도도 218명을 대상으로 심리상담을 진행한 결과 8명이 지속적인 관리 대상으로 분류됐다. 이들은 “생명을 죽이는 게 너무 힘들었다. 자꾸 눈물이 난다. 다시는 농장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등 죄책감과 무기력증을 호소했다.
이번 AI로 30여개 농가에 대한 살처분을 진행한 세종시도 공무원과 작업자, 농장주 등 600여명을 대상으로 심리 상담을 진행 중이다. 현재 100여명의 상담이 이뤄졌고 이중 5명이 위험군으로 분류돼 시 정신건강증진센터와 연계해 심리 치료중이다.
AI 트라우마 극복을 위한 상담이 형식에 치우친다는 지적도 나온다. 전화 상담이 주를 이루다 보니 실제 후유증에 시달리는 공무원을 파악하는데 한계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후유증에 시달리는 상당수 공무원도 바쁘다는 이유로 상담이나 치료를 받지 않는 경우가 많아 방치할 경우 심리적 장애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온다.
나경란 경기도 정신보건팀장은 “업무 등을 이유로 상담이나 치료를 받지 않는 사람이 많은 게 사실”이라며 “후유증을 방치할 경우 정상적으로 생활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될 수 있는 만큼 지속적인 상담은 물론, 증상에 따라선 의학적 처방도 필요하다”고 충고했다.
살처분에 동원된 용역업체의 외국인 근로자를 위한 상담 및 치료 프로그램이 없는 것도 문제다. 외국인 근로자는 살처분 현장에서 궂은 일을 사실상 도맡아 했지만 현재 각 시도가 운영하는 센터에선 대부분 내국인만 상담ㆍ치료하고 있다.
재난심리회복지원센터 관계자는 “AI 트라우마 후유증 치료에 내외국인을 구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며 “통역을 두고 상태를 면밀히 살피는 등 관리가 시급하다”고 말했다.
최두선 기자 balanceds@hankookilbo.com 이종구 기자 minju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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