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식주의자라고 해도 어디까지 먹느냐에 따라 여러 단계로 분류된다. 동물성 단백질을 전혀 먹지 않는 극단적인 채식주의자인 비건도 있고 그 보다 더 엄격하게 식물의 열매나 씨앗이나 뿌리는 먹지 않고 잎사귀만 먹는 채식주의자도 있다고 했다(지난 칼럼 ‘극단적 채식주의자가 감자와 브로컬리를 안 먹는 이유’ 보기). 일부 동물의 부산물인 달걀이나 우유는 먹는 락토-오보 채식주의자, 유제품은 먹되 달걀은 먹지 않는 락토 채식주의자, 생선이나 유제품은 먹지 않지만 달걀은 먹는 오보 채식주의자도 있다.
이런 다양한 채식주의자의 종류를 말하는 게 우리나라 상황에서는 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우리 주변에서 실제로 채식주의자를 만나기가 쉽지가 않으므로 비건이니 락토-오보 채식주의자니 하는 것은 잡학상식쯤으로 기억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글쓴이도 다른 사람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메뉴에 고기가 있을 때 고기를 먹지 않는다고 말하면 채식주의자를 실제로 처음 봤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러고 보니 글쓴이도 채식을 하기 전에는 채식주의자를 실제로 만난 적은 한두 명 정도밖에 없었다.
입맛이나 종교에 따른 채식주의는 개인의 선택이므로 다른 사람을 설득할 일이 없지만 윤리적 채식주의는 채식을 해야 하는 윤리적 근거를 제시하므로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고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논증이 그렇지만 논증에 단박에 설득되기란 쉽지 않다. 아무리 이성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도 오랫동안 굳어진 습관과 선입견에서 벗어난 생각을 선뜻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채식주의를 이해시키기 가장 쉬운 방법은 채식 식단이나 채식주의자를 주변에서 자주 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스님들이 채식을 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처럼, 주변에서 채식 식단이나 채식을 실천하는 사람을 자주 본다면 채식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채식 식당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드물고 채식인이 비채식인이 함께 가기는 힘들다. 오히려 채식 식단을 쉽게 접할 수 있는 곳은 비행기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행기의 기내식을 주는 대로 먹지만, 기내식은 굉장히 다양한 종류가 있다. 비행기는 글자 그대로 글로벌한 운송 수단인데, 우리나라를 벗어나면 세상에는 종교에 따라, 건강상의 이유에 따라, 입맛에 따라, 신념에 따라 특정 음식을 가리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다. 그들에게 기내식을 똑같이 주면 비행 시간 내내 쫄쫄 굶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비행기에서 모든 식단을 갖추고 있을 수는 없으므로 항공사들은 사전에 예약한 사람들에게 이른바 ‘특별식’을 제공한다. 어느 항공사 홈페이지에든 한번 들어가 보면 어떤 특별식이 있는지 알 수 있다. 비건이나 락토-오보 채식주의 등 다양한 채식 식단도 있고, 유대교도들이 먹는 코셔 음식이나 이슬람교도들이 먹는 할랄 음식도 있다. 과일로만 이루어진 식단도 있고 고기 대신 해산물이 들어간 식단도 있다. 그리고 건강을 위해 탄수화물과 지방의 함량을 낮추거나 칼로리를 낮추거나 글루텐을 제한하거나 특정 알레르기를 유발하는 식재료를 뺀 식단도 있다.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또는 생각도 하지 못한 온갖 기내식이 있는 것이다.
비행기를 타고 해외에 나가는 일이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닌 세상이니 비행기를 타면 이런 특별식에 한 번 도전해 보길 권한다. 채식주의를 이해하는 길도 되지만, 또 다른 장점도 있다. 일단 특별식은 다른 기내식보다 먼저 가져다 주니 ‘특별’ 대접을 받는 느낌도 든다. 이름부터가 특별식 아닌가? 그리고 특별식이 대체로 부담없는 식재료로 만들어져 있기 때문에 앉아서만 가야 하는 기내에서 소화도 잘 된다.
미국 작가인 A. J. 제이콥스는 ‘미친 척하고 성경 말씀대로 살아본 1년(2008, 세종서적)’에서 기내식으로 코셔 음식이 정성 들여 만들어 진다는 말을 듣고 유대교 신자가 아닌데도 코셔를 일부러 주문해 먹는다. 이 말을 우리 딸에게 해 준 적이 있는데 딸은 실제로 기내식으로 코셔 음식을 신청해서 먹은 적이 있다. 제이콥스는 맛이 없었다고 하지만 딸은 아주 만족스러웠다고 한다. 이 말은 들은 아내도 다른 여행에서 코셔 음식을 신청한 적이 있는데 별로였다고 한다. 옆에 있던 나도 한 입 먹어 봤는데 무슨 맛인지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밍밍했다. 호불호가 많이 갈리든지 항공사마다 재료나 조리 방법이 다른지 모르겠다.
글쓴이는 지난달 말에 미국에 왔다. 해외에 갈 일이 가뭄에 콩 나듯 있지만 비행기를 타면 항상 채식 식단을 주문한다. 이번에도 채식 식단을 주문했는데, 뭔가 착오가 있었는지 내 주문이 빠져 있었다. 그런데 내가 탄 항공기에 인도에서 온 승객들이 수십 명이 인천 공항에서 환승을 했는데, 마침 그들이 주문한 힌두식 식사 중 남은 게 있어서 그걸 먹게 되었다. 정식 명칭은 아시안 힌두 베지테리안 식사(Asian, Hindu Vegetarian Meal)로 유제품만 들어간 채식주의 메뉴이다. 인증샷을 한 장 찍었다. 가운데는 사프란을 넣은 밥인 것 같고 오른쪽은 감자를 넣은 카레 같은데, 왼쪽음식은 뭔지 잘 모르겠다.
최훈(강원대학교 교수, 철학, ‘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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