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교정지가 도착했다. 지난 몇 달 작업한 번역 원고다. 편집자는 교정지 곳곳에 알록달록한 포스트잇을 붙여두었다. 서재방 책상에서 키보드를 두들길 때와 달리 나는 필통 가득 잘 깎은 연필을 채워 거실로 나왔다. 보일러 온도를 높이고 러그를 깐 뒤 쿠션도 곳곳에 던졌다. 그러니까 나는 교정지를 볼 때에는 따뜻한 바닥에 엎드려야 하는 것이다. 왜 그런 버릇이 생긴 건지는 모르겠다. 그냥 처음부터 그랬다. 교정지는 추후 출간될 책 모양 그대로 나에게 건네진다.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페이지가 앞으로 독자가 읽을 페이지라 생각하면 괜히 코끝이 뜨끈뜨끈해지곤 한다. 나는 독자처럼 다소 게으르게 엎드려 교정지를 마주한다. 옆에 귤 바구니쯤 그래서 꼭 필요하다. 예전, 첫 소설집 교정지를 받아 들었을 때 편집자 출신이던 당시의 애인은 연필을 들고 나보다 더 섬세하게 원고를 만져 주었다. “이 문장은 짧게 쳐버리는 게 어때? 마지막 두 글자가 뒷장으로 넘어가잖아. 그렇게 되면 페이지가 예쁘지 않아.” 편집자는 그런 것도 고민하는구나, 나는 감탄하며 그의 말대로 문장을 잘라냈다. 허리께에 담요를 덮은 채 나는 말랑말랑한 지우개로 지워가며 이렇게도 고쳐보고 저렇게도 고쳐본다. 교정을 본다는 건 내가 원고와 작별인사를 나누는 과정이다. 그래서 미련 많은 여자처럼 나는 자꾸 뒤돌아본다. 이왕이면 작별의 말을 꽤나 그럴 듯하게 잘 던지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다시 주워 담지 못할 말, 후회 없이 곱디곱게 뱉어 원고와 이별을 해야지. 예쁜 표지를 달아 이제 출간이 되면 누군가의 훈훈한 집에서 새 생을 살겠지. 잘 가라, 원고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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