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10월 9일.
북한의 고려민항 특별기가 평양 순안공항에 착륙했다. 이 비행기에는 이틀 뒤 능라도 5.1 경기장에서 열릴 ‘남북통일축구’에 출전할 한국 남녀축구대표팀 선수단이 타고 있었다. 분단 이후 남북스포츠의 첫 평양 회동이었다. 이는 1991년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와 지바 탁구세계선수권에서 남북이 단일팀을 이루는 시금석이 된 역사적인 발걸음이었다.
남북한 축구가 평양에서 27년 만에 맞대결하게 됐다.
한국은 2018년 요르단 여자 아시안컵 예선 조 추첨에서 북한, 우즈베키스탄, 홍콩, 인도와 함께 B조에 편성됐다. B조 예선 모든 경기는 오는 4월 평양에서 치러진다. 남북 축구는 2010년 남아공 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과 최종 예선에서도 잇달아 한 조에 속해 평양 격돌이 예상됐다. 하지만 북한이 태극기 게양과 애국가 연주를 거부해, 결국 경기 장소가 제3국 중국 상하이로 바뀌었다. 반면 이번 여자축구는 정상적으로 소화할 가능성이 높다. 남북을 포함해 5개국이 한꺼번에 경기하는 방식이라 북한이 한국만 문제 삼기는 명분이 약하다는 전망이 나온다.
27년 전 방북 멤버였던 김주성(51) 대한축구협회 심판실장은 “당시 갑작스런 평양 방문 소식에 선수들이 조금 불안했던 게 사실”이라고 떠올렸다. 남북 정부는 그 전부터 통일축구를 논의하다가 베이징아시안게임(9.22~10.7)이 한창이던 9월 29일 공식 발표했다. 선수들은 아시안게임을 마친 직후 베이징에서 곧바로 평양으로 갔다. 황보관(52) 축구협회 기술교육실장은 “평양 도착 20분쯤 전 갑자기 고도를 낮춰 깜짝 놀랐는데 압록강을 가까이서 구경시켜주려는 의도였다”고 회고했다. 순안공항의 환영 인파는 어마어마했다. 김 실장은 “우리를 목마 태워 버스까지 가는데 모두 눈물 흘리며 ‘조국 통일’을 외쳤다. 뭐랄까. 철저히 교육된 행동 같아 섬찟 했다”고 털어놨다. 고려호텔에 여장을 푼 뒤에는 북한에서 짜놓은 동선 대로만 움직였다. 서커스 전용체육관인 평양교예단, 수영장과 현대식 체육시설을 갖춘 평양학생소년궁전 등 북한이 자랑할 만한 건물만 견학했다.
경기 당일 능라도 5.1 경기장은 15만 관중으로 가득 찼다. 북한 선수들과는 그 전에 국제무대에서 종종 마주친 적이 있어 어색하지 않았다. 승패가 크게 중요한 경기는 아니라서 경쟁의식도 평소보다 약했다. 김 실장은 선제골을 넣은 뒤 세리머니를 했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관중들이 그를 일제히 이상한 표정으로 쳐다봤기 때문. 김 실장은 “북한 사람들은 세리머니에 익숙하지 않은 듯했다. 내가 한국 선수 중 유일하게 머리 부분 염색을 하고 있어서 더 그랬던 것 같다”고 웃었다. 안방에서 15만 관중을 불러 모은 북한이 이대로 질 수는 없는 노릇. 얼마 뒤 북한의 동점골이 나오자 “북한이 1골 더 넣기 전까지 경기가 안 끝날 것”이라는 말이 돌았다. 결국 후반 추가시간 북한이 페널티킥을 얻어 2-1로 역전승했다. 황보 실장은 “페널티킥은 정말 말도 안 되는 판정 이었다”고 회상했다. 한국 최인영(55) 골키퍼가 화가 나 공을 밖으로 뻥 차는 바람에 잠깐 분위기가 얼어붙기도 했지만 금세 풀렸다. 김 실장은 “북한 주심이 경기 끝나고 미안하다고 했다. 그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공교롭게 현재 남북 여자대표팀 사령탑인 한국 윤덕여(56), 북한 김광민 감독 모두 27년 전 통일축구 멤버다. 윤 감독은 “김광민 감독은 오른쪽 수비수였는데 아주 빨라 애를 먹었다”고 기억했다. 당시 통일축구는 남자만 열렸다. 여자 축구는 한국이 북한보다 전력이 훨씬 약해 망신을 피하기 위해 양 팀이 합동훈련만 했다. 베이징 아시안게임 본선에서 한국은 북한에 0-7로 대패하기도 했다. 지금은 격차가 줄었지만 객관적인 전력에서 여전히 북한이 우위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도 북한이 10위, 한국이 18위다. 상대 전적에서도 한국이 1승2무14패로 절대 열세다. 윤덕여 감독은 김광민 감독과 2013년 동아시안컵(1-2 패), 2014년 인천아시안게임(1-2 패), 2015년 동아시안컵(0-2 패), 작년 리우올림픽 최종예선(1-1 무) 등 4년 연속 만나 1무3패로 한 번도 못 이겼다. 윤 감독은 “북한과 한 조가 된 게 솔직히 달갑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 1골 차 패배였고 경기 내용에서 크게 밀리지 않았다”며 “개인적으로는 두 번째 평양 방문인데 선수 때는 1-2로 졌지만 이번에는 좋은 결과를 가져오고 싶다”고 각오를 다졌다.
윤태석 기자 sportic@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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