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25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남은 전력(戰力)을 긁어 모으다시피 해서 전개한 마지막 대반격이 1944년 12월 16일의 이른바 ‘벌지(Bulge) 전투’다. 그 작전을 입안한 독일 서부전역사령부 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원수의 이름을 따 ‘룬트슈테트 공세’라고도 하고, 전선의 지명인 벨기에 아르덴에서 따 ‘아르덴 전투’라고도 한다. ‘벌지’는 ‘코처럼 돌출돼 있다(nose like salient)’는 뜻. 독일 기갑사단의 기습 진격으로 전선 모양이 주머니처럼 볼록해진 형상에 빗대 미군측이 붙인 이름이다.
노르망디 상륙전으로 승기를 잡은 연합군은 유럽 전역으로 전선을 확장하며 나치를 몰아 붙였고, 동부전선의 러시아까지 상대해야 했던 나치는 44년 들면서 기세가 꺾였다. 하지만 확장된 전선 보급로 확보를 위해 그 해 9월 연합군이 벌인 이른바 ‘마켓가든 작전’의 참패로 전황은 주춤했다. 히틀러는 그 상황을 반전의 기회라 판단했다. 정예 기갑사단을 벨기 아르덴 삼림지대에 집결시켜 숲을 뚫고 네덜란드 안트베르펜까지 진격한다는 구상. 성공할 경우 서부전선 북부 연합군을 포위할 수 있고, 연합군 보급로를 장악함으로써 막대한 군수물자를 얻게 된다는 게 그의 계산이었다.
성패는 기습과 전격전에 달려 있었다. 12월까지 기다린 것도 동절기 숲의 안개를 이용하기 위해서, 즉 부대 이동을 최대한 감추고 제공권을 장악한 연합군 폭격을 모면하기 위해서였다. 방어전인 양 위장하기 위해 독일이 붙인 작전명은 ‘라인을 수호하라’였다.
방심했던 연합군, 특히 그 전선의 주력이던 미군은 전투 초기 연패하며 큰 희생을 치렀다. 하지만 아이젠하워의 판단과 실행력은 독일 전차의 진격 속도보다 빨랐다. 그는 연합국 수뇌와의 협의 절차를 무시한 채 전력을 즉각 이동 배치해 방어선을 쳤고, 대대적 반격에 나섰다. 연료와 탄약마저 부족한 상태로 오직 연합군 군수창고와 보급로만 보고 덤벼들었던 독일은 밀리기 시작했다. 전투는 바스토뉴 공성전 직후 사실상 끝이 났다. 독일군에게 그건 전략의 패배가 아니라 기량과 군비의 패배였다.
독일군 사령부는 45년 1월 23일 작전 중지 결정을 내렸고, 1월 25일 전투가 끝났다. 미군은 전사 1만 9,000여 명, 부상 4만 7,000여 명의 피해를 입었고, 독일군은 약 6만~12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벌지 전투로 인해 나치독일의 패망이 6개월 가량 앞당겨졌다는 분석이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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