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24
‘위대한 소수자’ 서굿 마셜(Thurgood Marshall)이 1993년 1월 24일 별세했다. 그는 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NAACP)의 초기 법률팀 멤버로 활약한 수정헌법 변호사였고, 미국 헌법의 권위와 기품을 한껏 드높인 흑인 첫 대법관이었다. ‘위대한 소수자’란, 일전에 소개한 인권변호사 이돈명에게 붙어 다니던 ‘유죄 변호사’란 수식처럼, 대법관으로서 소수의 편에 섬으로써 개별 판결보다 더 우람한 법의 정신을 지켰다는 의미로 붙여진 영예다. 그는 자신의 평생 신조가 “당신이 옳다고 믿는 바를 행하라. 법이 뒤를 따를 것이다”였다고 말했다. 사뭇 위험해 보이는 그의 믿음이 빛났던 것은, 물론 그의 시대의 인권 현실과 개별 법률들이 헌법의 정신, 민주주의 이상과 크게 벌어져 있어서였다. 그의 또 하나의 신조는 “사회를 고치는 엔지니어가 되자”는 거였다. 그 도구가 법이었다.
그는 1908년 메릴린드 주 볼티모어의 한 철도 하역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교사였고, 할아버지는 해방노예였다. 증조부는 콩고 출신 노예로 팔려온 이였다. 어려서 아버지가 그에게 헌법 공부를 시켰다는 말도 있지만, 학교 선생님이 악동이던 그에게 벌로 헌법조문을 암기하게 했다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다. 소년 마셜은 심한 말썽쟁이였고, 고교시절 친구를 못살게 구는 심한 장난으로 두 차례 정학을 맞기도 했다. 당시의 자신을 그는 “거칠고 나대고 시끄럽고 비뚤어진 아이(rough and ready, loud and wrong)”였다고 고백했다.
그는 링컨대를 거쳐 고향 메릴랜드주립대 로스쿨에 원서를 냈다가 흑인이어서 거부 당한 뒤 흑인대학인 하워드대에 진학해 1933년 1등으로 졸업했고, NAACP 원년 인권변호사 찰스 해밀턴 휴스턴을 은사로 만나 큰 영향을 받았다. 마셜이 NAACP 변호사가 된 것도 휴스턴의 권유에 따른 거였다. 흑인 분리교육 위헌 판결로 유명한 ‘올리버 브라운 대 토피카 교육위원회 사건’의 변호사가 그였다.
그는 케네디 정부의 연방 항소법원 판사로, 린든 존슨 정부의 송무담당 법무차관으로, 대법관(67년 10월)으로 승승장구했다. 그의 출세는 미국 민권ㆍ인권의 확장과 나란히 이어졌지만, 그의 생애가 가장 빛났던 것은, 80년대 이후 미국의 보수화와 대법관으로서 선택한 줄기찬 소수의견을 통해서였다. 그는 91년 10월 은퇴했고, 1년여 뒤 별세했다. 바통을 잇듯 그 해 출범한 빌 클린턴 정부는 마셜의 무덤에 대통령 자유메달을 바쳤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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