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가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와 관련해 23일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21일 블랙리스트 작성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조윤선 장관(51)이 구속되고, 사퇴 의사를 밝힌 이후 비상근무체제에 들어간 지 이틀 만의 행동이다. 그러나 늦어도 너무 늦은 사과였다. 함께 내놓은 대책마저 추상적이어서 ‘면피용 퍼포먼스’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송수근 문체부 장관 직무대행(제1차관)은 23일 정부 세종청사에서 열린 대국민사과 발표에서 “예술 표현의 자유와 창의성을 지키는 보루가 되어야 할 우리 문화체육관광부가, 공공지원에서 배제되는 예술인 명단으로 인해 문화예술 지원의 공정성 문제를 야기한 것에 대하여 너무나 참담하고 부끄럽다”고 밝혔다. 이어 문화예술분야 애로사항을 수렴하는 ‘문화 옴부즈만’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문화예술진흥법을 개정해 표현의 자유에 차별, 개입을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규정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부당 축소, 폐지 논란이 있는 지원사업의 원점 검토도 약속했다.
그러나 사과문은 블랙리스트 작성자, 적용 대상, 보고 주체 등 관련 내용 파악이 전무한데다 내부 감사ㆍ징계 계획마저 들어있지 않았다. “앞으로 특검 수사 등을 통하여 문체부가 져야 할 책임에 대해 마땅히 감내하겠다”는 당연한 사실을 배포 큰 결단처럼 호언한 송 직무대행은 자체 감사와 징계 계획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특검 수사가 진행 중인 상황이라 전모를 알 수 없다”는 말만 7차례 반복했다.
대국민 사과를 비롯한 문체부 입장 발표가 현직 장관이 구속된 뒤에야 이뤄졌다는 점도 비판을 부를 만하다. 최순실씨 국정 농단의 주무대였던 문체부는 여태 관련자 징계는커녕 사과조차 하지 않았던데 대해 “전모를 모르는 상황에서 언제 이런 정도의 사과를 해야 할지 판단하기 어려웠다”고 답했다.
블랙리스트 ‘부역자’논란에서 자유롭지 않은 송 직무대행이 사과문을 발표한 게 진정성이 있느냐는 지적도 나온다. 송 직무대행은 2014년 10월부터 지난해 12월까지 문체부 기획조정실장으로 재직하며 ‘건전콘텐츠 티에프(TF)팀’ 팀장을 맡아 블랙리스트에 오른 각 실ㆍ국의 ‘문제 사업’을 관리하고 총괄한 의혹을 받고 있다. “저희 부서가 (블랙리스트를) 총괄관리했다는 건 사실이 아니라”는 해명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그는 지난 5일 참고인 신분으로 박영수 특별검사팀에 출석해 조사를 받기도 했다.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 성명에 이름을 올려 블랙리스트에 오른 임인자 연극연출가는 문체부의 대국민 사과에 대해 “자기쇄신 없는 사과는 사과일 수 없다. 또한 사과가 아닌 사죄이어야 한다”고 일침을 놓았다. ‘영혼 없는 공무원’ 등 온갖 비아냥과 손가락질을 받고 있는, 바닥으로 떨어진 문체부의 신뢰를 끌어올리려는 길에 허울뿐인 사과는 오히려 걸림돌에 불과하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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