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23
근 300년 먼저 산 프랑스 작가 스탕달(Stendhal, 1783~1842)의 ‘연애론’(김현태 옮김, 집문당)이 21세기의 우리에게 선사할 ‘연애의 기술’은 많지 않을지 모른다. 사랑에 빠지면 아무리 현명한 남자(혹은 여자)라도 상대의 호의를 과대평가하고 자신의 장점을 과소평가하며 “그리하여 (사랑의) 불안과 희망이 일종의 소설적인 요소를 띠게 된다”거나, 사랑은 늘 얼마간의 혼란을 수반하므로 “그들은 뜻하지 않은 우연적인 말로만 자기 감정을 정확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마음의 울부짖음”이라는 말, 또 “현대의 결혼에서 일어나는 죄와 불행의 원인은 P(로마 가톨릭)이다. 그것은 결혼 전의 처녀에게서 자유를 빼앗고, 그녀가 선택을 그르친 후에는 이혼을 금하고 있다”는 통찰은, 여전히 우리를 울렁거리게 한다.
배울 게 많지 않다는 건 그의 허술함 탓이 아니라 오늘의 연애 상식이 그만큼 두터워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두터움이 늘 풍성한 연애 혹은 건강한 연애의 밑천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비단 연애뿐 아니라, 앎에만 머물기 쉬운 인간의 여러 지식의 한계일 것이다.
오해일 수도 있지만, 스탕달은 좋은 연애를 거의 못 해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나폴레옹 패전 직후 이탈리아로 이주해 사는 동안, 밀라노의 한 장군의 아내에게 마음을 빼앗겨 열렬히 구애했으나 철저히 외면당하고 도망자 신세로 쫓겨난 게 경험의 전부라는 말도 있다. 그러니 그의 연애론은 몸이 아닌 머리, 이성의 시뮬레이션으로 깨어난 감성이 이성의 통제를 받아가며 쓰여진 글일 것이다. 대표작 ‘적과 흑’의 쥘리앵 소렐과 레날 부인의 그 뜨거운 사랑이, 소렐과 마틸드의 아쉬운 사랑이 그렇게 쓰여졌을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그 사랑이, 글이 더 강렬하고 애틋할 수도 있다.
문학사는 그를 발자크 등과 함께 프랑스 사실주의 문학의 양대 거장으로 꼽는다. ‘적과 흑’에서 그는 나폴레옹 시대 전후 왕당파와 공화파, 보나파르니스트가 각축하던 정치구도를, 귀족과 사제, 신흥 부르주아와 평민 등 집단의 문화와 윤리를, 신분제 사회가 무너지기 시작한 시대 인간들의 출세를 향한 욕망과 위선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나폴레옹을 추종하며 보나파르티스트로 살았던 스탕달은, 어쩌면 연애에서처럼, 이국의 먼 발치에서 그의 시대를 관찰했을 것이다. 그의 문학, 그의 사실주의는, 경험의 양이 예술(혹은 연애)의 질과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슬프게 증명하고 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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