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취임하자마자 전 세계 여성들을 적으로 돌렸다. 대통령 취임 선언문의 잉크가 마르기 무섭게 여성혐오, 인종주의, 소수자 박해, 이주민 반대 등 그간 무수한 논란을 낳은 트럼프식 국제ㆍ사회질서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미국 전역은 물론, 지구촌에서 들불처럼 번져 나가고 있다.
미국 전역 반 트럼프 함성 뒤덮여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튿날인 21일 미국 워싱턴 내셔널몰 인근에서는 50만명이 참가한 반(反) 트럼프 시위가 열렸다. ‘여성들의 행진(Women’s March)’으로 명명된 행사에는 미국 각지에서 트럼프에 반대하는 여성과 소수자들이 몰려 들어 “트럼프는 퇴진하라” “여성 인권도 중요하다” 등 구호를 외쳤다. 영하로 떨어진 쌀쌀한 날씨에도 당초 주최 측이 예상한 참여 인원(20만명)을 두 배 이상 뛰어 넘었을 만큼 트럼프를 향한 반감의 골은 깊었다.
“우리(we)는 모두 피를 나눈 같은 미국인”이라며 취임사에서 하나된 미국을 강조한 트럼프의 일성은 전혀 먹혀들지 않았다. 행사를 주관한 여성행진 공동 집행위원장 타미카 말코이는 “지금 여기 서 있는 여러분이 없다면 미국은 다시 위대해질 수 없다”며 트럼프의 대선 구호인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를 비꼬았다. 집회 첫 번째 연사로 나선 미국 여성운동의 대모 글로리아 스타이넘(82)은 “평생 이토록 민주주의가 분출한 광경을 목도한 적이 없다”며 시민 연대를 놀라워했다.
분노는 수치로도 입증됐다. 이날 오후 4시 워싱턴 지하철 당국이 집계한 지하철 이용객 규모는 59만7,000명으로 전날 트럼프 취임식 당일 같은 시간 36만8,000명을 크게 앞질렀다. 시 당국은 임시 버스 주차장 1,800곳을 추가로 마련해야 할 정도였다. 현지 경찰 관계자는 AP통신에 “시위대가 도심을 뒤덮어 발 디딜 틈도 없었다”고 전했다.
반 트럼프 물결은 워싱턴에 국한되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인 시카고(15만명), 보스턴(12만5,000명), 로스앤젤레스(10만명) 등 미국 주요 도시에서 670여건의 크고 작은 집회가 진행됐다. 시카고에서는 예상을 훨씬 초과한 군중이 운집한 탓에 경찰이 경로 이탈 시 행진 중단을 경고하기도 했다.
“트럼프는 지구촌의 문제아”
트럼프의 일방주의를 규탄하는 성난 함성은 세계 주요도시에서도 메아리쳤다. 영국 런던, 스페인 바르셀로나, 독일 베를린, 호주 시드니, 일본 등 세계 70여곳에서 200만명 이상의 시민이 워싱턴 시위에 맞춰 반 트럼프 연대에 동참했다. 서울에서도 이날 오후 여성에 대한 편견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여성 권리행진’ 행사가 열렸다. 시드니 여성행진을 기획한 민디 프라이밴드는 “증오와 편견, 차별로 점철된 트럼프의 정책은 미국 만이 아닌 지구촌의 문제”라고 했고, 프랑스 파리 시위에 참가한 한 여성은 “트럼프는 전 세계의 위험 인물”이라고 성토했다.
여성들이 트럼프 반대의 선봉에 선 이유는 간명했다. 그가 대선 과정 내내 여성혐오 시각을 노출하며 분열과 배제의 리더십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이날 참석자 대부분은 분홍색 니트 모자를 쓰고 행진했다. “당신이 스타라면 여성들의 성기를 움켜쥘 수 있다(Grab them by the pussy)”는 트럼프의 과거 발언을 힐난하는 의미다. 아홉 살 딸의 손을 잡고 런던 시위에 나선 마리나 나이트(43)는 “우리가 당연시 해왔던 권리들이 후퇴해 미래 세대에 전가될 수 있다는 걱정이 컸다”고 참가 이유를 밝혔다. 미국의 팝스타 마돈나는 워싱턴 집회 연단에 올라 “여성으로서 폭압의 새 시대를 거부한다”고 일갈했다. 나탈리 포트만, 스칼렛 요한슨, 애슐리 주드, 마일리 사일러스 등 유명 여성 연예인들도 집회 현장에 나와 시위대에 힘을 보탰다.
트럼프 반대 구심점 될지는 미지수
반 트럼프 운동의 닻은 올렸지만 장밋빛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 정치 전문지 폴리티코는 “여성행진이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the Wall street)’의 전철을 밟느냐, 아니면 민주당의 ‘티 파티(Tea Party)’가 되느냐 기로에 서 있다”고 진단했다. 2011년 소수 금융자본의 탐욕에 맞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월가 시위가 기대와 달리 찻잔 속 태풍에 그친 사례에서 보듯, 여성행진이 공화당의 보수주의 유권자 단체인 티파티처럼 정치적 영향력을 가진 결사체로 발전하지 않으면 트럼프의 막가파식 국정운영을 제어할 수 없을 것이란 지적이다. 실제 구심점이 없었던 이날 시위대 사이에서는 성평등, 낙태, 기후변화 등 다양한 문제의식이 터져 나왔다. 워싱턴 시위에 깜짝 등장한 존 케리 전 국무장관은 “선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끔 정치인들을 움직이는 시민운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이삭 기자 hir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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