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핀란드 헬싱키에서 시작된 ‘슬러시’는 창업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모여 투자를 유치하고 창업 관련 정보를 공유하는 유럽 최대 신생 벤처기업(스타트업) 컨퍼런스다. 지난해 11월 열린 슬러시에는 약 1,700개의 스타트업과 800여명의 투자자가 참가했고, 관람객도 1만6,000여명에 달했다. 그 동안 슬러시를 통해 탄생한 대표적인 기업이 모바일 게임 ‘클래시 오브 클랜’을 만든 세계 최대 모바일 게임업체 슈퍼셀이다. 최근에는 핀란드를 대표하는 핀테크 스타트업들이 슬러시에서 줄줄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9번째로 열린 슬러시에선 한국 스타트업이 처음으로 공식 홍보(피칭)대회 ‘톱 4’에 올라 눈길을 끌었다. 삼성전자 사내 벤처 ‘C랩’ 출신 스타트업인 ‘스케치온’이다. 사전 예선을 통과한 100개 기업이 발표한 사업 모델을 평가해 ‘톱 20’이 선정되고, 최종 ‘톱 4’ 중에선 우승팀 1팀만 발표되기 때문에 스케치온은 사실상 준우승을 차지한 셈이다. 스케치온의 기술력이 해외 스타트업과 비교해 뒤지지 않는다고 인정받은 것이다.
인체에 무해하고 지우기도 쉬운 스킨 프린터 개발
스케치온은 원하는 그림을 피부에 문신처럼 새기는 스킨 프린터 ‘프링커’를 개발했다. 스마트폰용 프링커 소프트웨어(앱)를 통해 피부에 입히고 싶은 그림을 그린 다음 프링커로 원하는 신체 부위 피부에 슥 문지르기만 하면 문신 처럼 해당 그림이 새겨진다. 피부에 그려진 모양은 문신 스티커와 비슷하지만 100% 색조 화장품 원료를 사용해 인체에 무해한 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화장품 원료이기 때문에 지우기도 쉽다. 손으로 박박 문지르지 않으면 하루 정도는 유지된다.
프링커의 활용도는 무궁무진하다. 놀이공원이나 스포츠 경기장 등에 입장할 때 종이 입장권이나 팔찌형 이용권 대신 프링커를 활용하면 티켓 분실을 막을 수 있다. 종이나 플라스틱의 낭비를 줄일 수 있어 환경 친화적이기도 하다. 놀이공원에서 아이들의 얼굴이나 몸에 그림을 그려 주는 데 사용할 수도 있다. QR코드나 바코드를 그려 넣는 방식으로 마케팅에도 활용할 수 있다.
이종인(47) 스케치온 대표는 “프링커의 경쟁 상대는 타투(문신)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일종의 예술 장르로 여겨지는 기존 타투를 대체하는 게 아니라, ‘타투는 위험하고, 지울 수 없고, 아프고, 비위생적’이라고 생각해 꺼리는 사람들을 겨냥한다. 축제나 행사, 놀이공원 등에서 잠시 즐긴 뒤 지우고 일상으로 돌아가는 ‘컨템포러리(일시적인) 타투’인 셈이다. 손으로 그린 그림을 기기가 출력해준다는 점에서 ‘아날로그와 디지털의 만남’이라고 볼 수도 있다. 이 대표는 “타투 스티커는 선택할 수 있는 그림이 많지 않은데다 피부에 부작용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고, 바디페인팅은 전문가의 숙련된 솜씨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프링커는 이런 단점들을 모두 해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떡잎부터 달랐던 삼성 사내벤처
스케치온의 사업 아이디어를 처음 떠올린 건 윤태식(37) 스케치온 최고운영책임자(COO)다. 윤 COO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몸에 문신처럼 그림을 그리고 나서 쉽고 안전하게 지울 수 있는 기계가 있으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에서 일하면서 이 아이디어를 잊고 지내다가, 2010년 사내 신사업 아이디어 공모 때 기억을 되살려 지원했다. 덜컥 선정된 아이디어는 그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이 아이템은 2015년 분사(스핀오프) 과제로 뽑혔고, 윤 COO는 이 대표, 이규석(39) 최고기술책임자(CTO)와 함께 퇴사해 법인을 설립했다.
이후 스케치온은 세계 시장 진출을 목표로 해외 무대를 부지런히 누비고 있다. 지난해 7월 CJ E&M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주최한 한류 행사 ‘케이콘’에서 처음으로 일반 시민들에게 프링커 시연을 했다. 케이콘이 끝난 뒤 바로 올림픽이 열린 브라질로 날아가 리우데자네이루 삼성전자 홍보관을 찾은 관람객 2만여명에게 3주 동안 시연했다. 9월에는 유럽 최대 가전박람회인 독일 IFA에 참석했고, 올해 초에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 부스를 차렸다. 지난해 11월 미래창조과학부와 정보통신기술진흥센터가 주최한 ‘K-글로벌 스타트업 스마트 디바이스 공모전’에서 대상을 받는 등 수상 실적도 차곡차곡 쌓아가고 있다.
놀이공원ㆍ클럽ㆍ스포츠 시장 공략
스케치온은 올해부터 본격적으로 매출이 발생할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기업용(B2B) 시장을 공략한 뒤 소비자용(B2C) 시장까지 진출할 계획이다. B2B 쪽으로는 상류층이 주로 찾는 클럽(하이클래스 클럽)과 놀이공원, 스포츠 분야를 타깃으로 삼았다. 소비자용 프링커는 올해 하반기 출시 계획이며, 가격은 200달러 안팎이 될 것으로 보인다. 올해 목표 매출은 50억원으로 잡았다. 이 대표는 “누구나 자기 몸으로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셀프 익스프레션 도구’로 프링커가 자리잡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서희 기자 sh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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