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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를 위해, 이웃을 위해 뉴욕의 가난에 맞서다

입력
2017.01.21 0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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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한 당신] 닐 타이슨의 아버지 시릴 타이슨

시릴 디그래스 타이슨은 천체물리학자 닐 타이슨의 아버지다. 카리브해 출신 이민 2세인 그는 인종 차별과 갈등으로 격동했던 60년대 뉴욕의 공동체관계위원회(COIR)를 이끌며, 이민자들의 주거ㆍ교육 차별 해소를 위해 헌신했다. 그의 열정은, 그의 부모세대가 그랬듯, 어린 자녀에게 온전한 평등 사회를 살게 하겠다는 절박한 사명감에 닿아 있었다. 가족 제공, northsalem.dailyvoice.com에서.
시릴 디그래스 타이슨은 천체물리학자 닐 타이슨의 아버지다. 카리브해 출신 이민 2세인 그는 인종 차별과 갈등으로 격동했던 60년대 뉴욕의 공동체관계위원회(COIR)를 이끌며, 이민자들의 주거ㆍ교육 차별 해소를 위해 헌신했다. 그의 열정은, 그의 부모세대가 그랬듯, 어린 자녀에게 온전한 평등 사회를 살게 하겠다는 절박한 사명감에 닿아 있었다. 가족 제공, northsalem.dailyvoice.com에서.

내셔널지오그래픽채널의 2014년판 13부작 우주 다큐멘터리 ‘코스모스’를 진행한 스타 천체물리학자 닐 디그래스 타이슨(Neil deGrasse Tyson)은 1958년생이다. 1950년대 말~ 60년대의 미국 시민들은 인권의 새 지평을 열었고, 70년 아폴로 13호의 달 착륙을 시작으로 새로운 우주 시대를 개척했다. 유년의 닐에게도 그들은 영웅이었다. 물론 TV 브라운관 앞에 앉아 질리지도 않고 보던 아폴로 우주인들과 항공우주국(NASA) 과학자들은 모두 그보다 훨씬 피부색이 밝은 이들이었다.

가정해보자. 만일 닐이 저 부푼 시대에 태어나지 못했다면. 9살에 뉴욕 로즈센터의‘헤이든 천문관’ 천체망원경으로 뉴욕의 진짜 밤하늘과 별들 사이의 아득한 어둠을 보지 못했다면. 또 무엇보다, 어린 아들의 아득한 꿈을 키워주고자 했던 아버지 시릴 타이슨(Cyril DeGrasse Tyson)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쩌면 우린 ‘코스모스’의 그를 만나지 못했을지 모른다.

검은 피부의 가난한 이민자 2세였던 시릴 타이슨은 어린 아들의 그 거대한 꿈을 애틋하고 복잡한 마음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닐이 이웃집 개를 산책시켜주고 50센트씩 벌어 몇 년씩 모은 돈으로 산 첫 망원경을 함께 조립해 주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들이 망원경으로 별을 관측하는 동안, 아버지는 아들이 걸을 길을 닦았다. 열정이 좋은 교육을 만나 실력이 되고, 공평한 기회 위에 서기를, 그런 세상이 오기를 그는 바랐다. 그 시절 시릴 가족이 살던 뉴욕 리버데일(Riverdale)의 아파트 이름이 ‘스카이뷰 Skyview Apartment’였던 건 물론 우연이었겠지만, 그 우연에는 운명적인 데가 있었다.

뉴욕의 흑인 등 모든 이민자 소수인종ㆍ민족의 ‘아버지’이고자 했던 빈민운동가 겸 행정가 시릴 타이슨이 지난 해 12월 29일 별세했다. 향년 89세.

시릴은 카리브해 섬나라 키츠네비스(Kitts and Nevis) 출신 이민자 부모의 5남매 중 넷째로, 뉴욕 맨해튼에서 1927년 10월 19일 태어났다. 당시 뉴욕은 이민자들로 포화상태였다. 19세기 중반 아일랜드 대기근 이후 몰려든 아일랜드인들과 가난한 유럽 이민자들은 이미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었고,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주택난과 범죄율로 몸살을 알았다. 시릴의 부모가 뉴욕에 건너온 게 대전 직후, 뉴욕시가 이민규제법을 시행하기 직전이었다.

아버지 앨버트(Albert)는 식재료 공급업체에서 운송직원으로 일했고, 어머니 알티머(Altima)는 주부였다. 2004년 6월 포드햄대학 ‘브롱크스 구술사 프로젝트’ 인터뷰에서 시릴은 “당시 이민자들은 공동체 단위로 살았지만, 뚜렷한 분업체계로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아일랜드 인들이 수프를 끓이면 독일인들은 빵을 굽고, 이탈리안이 트럭을 몰면 흑인들은 접시를 닦는 식이었다.(…) 한 가게가 일손이 필요하면 일꾼에게 말만 하면 동네에서 데려오는, 아주 효율적인 시스템이었다”고 말했다. 그 효율은 닫혀서 안정적인 효율, 새로운 기회와 가능성을 차단당한 사회의 효율이었다.

시릴의 인터뷰는 유년 시절 잦은 이사와 새로 살게 된 동네 이야기로 이어졌는데, 아이들이 보다 나은 환경에서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아금바르게 헤매고 다니던 어머니 이야기가 특히 인상적이었다. “우리 가족은 꽤 유명했는데, 공동체 활동에 적극적이던 어머니 덕이었다. 어머니는 활달하고 발이 넓어서 흑인 뿐 아니라 여러 공동체 사람들, 백인들과도 교류하곤 했다. 물론 당시엔 그냥 백인이 아니라 출신 국적으로 불렀다.” 중졸 학력인 어머니는 아이들을 아등바등 백인들 곁으로, 주류사회 변두리에라도 닿게 하고자 애썼다고 한다. 그것은 중력장을 탈출하는 것만큼 고되고 어려운 일이었다. 시릴 가족에게 허락된 집과 공동체는 대개 가난한 백인들이 살기를 마다한 집, 포기한 공동체였다. 할렘에 살다가 브롱크스 롱우드 스트리트의 집으로, 얼마 뒤 침실 천장이 무너지는 바람에 다시 캘리 스트리트로…. 그런 식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가족은 가난했다. 10대의 시릴도 길에서 구두를 닦았다. 한 친구와 동업하며 손님이 없는 동안 구두닦이 상자를 서로 지켜주며, 근처 꽃가게 배달 일을 겸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배달로 번 돈은 60년대의 닐이 벌던 50센트의 1/5인 10센트였다. 시릴은 그렇게, 루즈벨트 교고- 모리스 고교- 쿠퍼주니어 고교를 거쳐 브루클린의 성프랜시스칼리지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 전학을 갈 때마다 동급생 중 백인들이 점점 늘어났고, 쿠퍼주니어고교 재학생은 거의 모두 백인이었다. 시릴은 공부도 곧잘 했지만, 중학생 때부터 이름을 날린 육상 선수였다. 1950년과 51년 메트로폴리탄 대학선수권대회 중거리(600야드)에 출전, 금메달을 따기도 했다. 아르바이트도 해야 했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시작되는 10월부터는 자정부터 아침 8시까지 우체국에서 일하고, 곧장 등교해 2시까지 수업 듣고, 밤 10시까지 육상 훈련을 받았다는 이야기, 잠은 주말에만 몰아 잤다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그는 저 인터뷰에서 전했다. 그 와중에 서너 살 때부터 알던 선치타 펠리시아노 타이슨(Sunchita Feliciano Tyson)을 만나 훈련을 빼먹는 ‘투혼’으로 데이트하며 52년 결혼했다. 닐은 부부의 3남매 중 둘째였다.

백인들 틈에 섞여 살았지만 특별히 차별당한 경험이 많지 않았던 건 운동 잘 하는 아이들에 대한 또래들 특유의 존중감 덕이었다고 그는 말했다. 언제 어느 구역을 피해 다니면 ‘안전’할 수 있는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지만 군대는 달랐다. 그는 46년 1월 육군에 자원 입대해 유럽 전선에서 전쟁을 치렀다. “자원 입대한 까닭은, 어차피 징집영장 받을 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내가 원하는 부대에 배치 받기 위해서였다. 해군이나 해안경비대에 가면 흑인은 무조건 취사병이었다.(…) 군에서는 모든 게 차별적이었다.” 제대 후에는 백인 클럽인 뉴욕 육상클럽에 들지 못해 흑인과 유대인들의 모임인 ‘파이어니어 클럽’에 가입해 활동했다.

40년대의 뉴욕은 도시의 경계가 확장된 대신 미국 남부 흑인들의 ‘대이주’와 2차 대전 유럽 난민들로 또 한 번의 인구 폭발을 겪는다. 인구 압박은 뉴욕뿐 아니라 동부 대도시들의 인종갈등과 대립을 심화시켰다. 1944년 2월 뉴욕시가 ‘행정명령을 통한 시장직속통합위원회’를 만든 건 “뉴욕 시를 모든 인종과 종교가 화합하고 상호 존중하며 공존하는, 삶의 실재로서의 민주주의의 장으로 거듭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 뿌리는 물론 극심한 빈부격차, 기회의 불균등이었다. 위원회는 고용ㆍ교육 평등법안 제정과 저개발지역 투자 촉진 위원회 설립ㆍ운영 등에 기여했다. 자문기구에 불과하던 초기 위원회는 50년대 중반 차별 현안에 대한 조사권과 청문회 소집권한 등이 부여되면서 ‘공동체관계위원회(COIR, Commission On Intergroup Relations)’로 재편되고, 62년 현재의 ‘인권위원회(CHR)’로 또 한 차례 격상되면서 차별 조사 강제력과 기소권을 부여 받았다. 그 위상의 변화는 격렬해져 가던 인종 갈등의 양상을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위원회의 주 임무도 공동체간 소통과 긴장을 유발할 수 있는 편견과 불관용 근절, 주택 교육 등 차별 사례를 조사 연구하고, 해법을 모색하는 일이었다. 린든 존슨 대통령(1963~69년 재임)이 가난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64년, ‘위대한 사회’ 연두교서를 발표한 것은 65년이었다.

군 제대 후 콜럼비아대에서 사회사업학으로 석사 학위를 딴 시릴이 닐을 얻은 58년 선택한 직장이 뉴욕 COIR이었다. 그는 교육 주거 고용 등 소위원회를 두루 거치며 소수집단 권익 옹호 활동을 시작했고, 60년부터 교육소위 책임자로 일했다. 그의 빠른 승진은 남다른 능력 덕이기도 했겠지만 고급 흑인 인력이 귀한 탓이기도 했을 것이다. 63년 그는 국가 빈곤퇴치 사업이던 ‘할렘 청소년 기회 증진 프로젝트(HARYOU)’의 기획책임자로 스카우트됐고, 훗날 총책임자로 활동했다. 지역 공립학교 교육서비스 증진과 주거자 직업교육, 방과후 학교, 청소년 직업훈련 등 프로그램이 그가 주력한 일이었다. 64년 시릴은 흑인 교육부진과 관련한 한 회의에 참석해 “흑인 학생들이 공부를 안 하는 게 아니라 교사들이 가르치지 않는 것”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교사들부터 흑인 학생들에 대해 낮은 기대를 품고 있다. 그들이 흑인이기 때문에 공부를 못한다고 말하지 않는가.” 기초생활자금 수급자를 옹호하며 ‘보스턴 글로브’에 이런 글을 기고하기도 했다. “도움을 원하는 이들을 열등한 존재로 취급하는 대중적ㆍ행정적 편견이 암묵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다만 생산적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원하는 이들일 뿐이다.”(NYT, 16.12.30)

그는 COIR와 뉴워크 비영리 ‘공동체통합조합’ 대표를 거쳐 66년 뉴욕 인적자원관리국 차장을 지냈다. 요컨대 시릴은 60년대 뉴욕의 흑인ㆍ이민자들이 살면서 딱한 상황에 처하면 믿고 찾아가 의지하던 드문 행정가였다. 63년 소수자 기회 증진을 위해 헌신하고자 결성된 ‘흑인 100인단 One Hundred Black Men’에 농구스타 재키 로빈슨 등과 함께 그도 포함됐다. 은퇴 후에는 하버드대 정치학회 펠로십을 거쳐, 뉴욕시립대와 뉴욕항만공사 홍보 책임자로 일했고, 자신이 겪은 가난과 공동체적 고난 등에 대한 3권의 책을 썼다.

12살 닐 타이슨의 첫 망원경을 함께 조립해주는 아버지 시릴 타이슨. 시릴 같은 이들이 길을 살펴 닦아준 덕에 닐 같은 이들이 하늘을 한껏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가족 제공, loe.org
12살 닐 타이슨의 첫 망원경을 함께 조립해주는 아버지 시릴 타이슨. 시릴 같은 이들이 길을 살펴 닦아준 덕에 닐 같은 이들이 하늘을 한껏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가족 제공, loe.org

가족이 이사를 다닐 때마다 토박이 주민들의 텃세와 눈총을 받아야 했던 건 어린 닐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이 조금씩 더 열리고 기대가 더 커진 만큼 닐이 겪은 상대적 박탈감은 오히려 아버지보다 더 컸을지 모른다. NASA 50주년 기념식 축사에서 닐 타이슨은 60,70년대 우주프로그램들을 지켜보며 느낀 흥분과, 자신은 결코 우주인이 될 수 없으리라는 좌절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주 비행 장면을 보며) 다른 이들이 느꼈을 대리만족의 감정이 내겐 없었다. 당시 나는 물론 우주비행사가 되기엔 너무 어렸지만, 더 앞서 알던 사실은 그 서사시적인 모험의 일부로 여기기에는 내 피부색이 너무 어둡다는 거였다.”(geekquality.com, 12.5.3)

그래도 그는, 앞서 보았듯이, 상대적으로 좋은 때와 장소와 기회-좋은 부모와 좋은 멘토(칼 세이건) 포함-를 얻은 행운아였다. 그리고, 아버지를 지켜보며 자신과 같은 행운을 얻지 못한 같은 피부색의 이웃들을 알았다. “한 해 한 해, 차별을 없애려는 노력과 함께 그것에 저항하는 힘들도 커져왔다. 가난한 학교들, 나쁜 교사들, 빈약한 자원과 비열한 인종주의, 암살 당하는 지도자들…. 나는 유년의 나 같은 이들과 내가 꿈꾸던 삶을 주변화하려고 안간힘 쓰는 미국도 지켜봐 왔다.” 그는 인종 문제에 관한 글에선 우주를 소개할 때와 같은 특유의 위트를 좀체 섞지 못했다.

어쩌면 시릴은, 마음 한 켠에 모종의 자책감을 품고 살았을지 모른다. 늘 마주하던 가난한 구직자들과 달리 그에겐 좋은 직장이 있었고, 그들과는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여유로운 중산층으로서, 상대적으로 나은 동네에서 살았다. 거리의 활동가들이 공권력에 맞서고 이웃들이 돌과 쇠파이프를 들 때에도 그는 대개 싸움을 말려야 하는 입장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의 길이, 비록 더디긴 해도, 더 현실적이고 안정적인 길이라 믿고 또 자위하기도 했을 것이다.

닐 타이슨도 2008년 하워드휴즈메디컬인스티튜트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했다. “천체물리학은 누군가의 접시에 음식이 담기게 하는 데 필요한 첫 학문도 아니고, 소외된 이들의 처지를 개선하는 데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학문도 아니다.” 그리고, 책임과 정당함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반문하곤 한다고 말했다. “우주에 대한 내 관심은 진짜였고, 핏줄을 돌아 심장으로 느껴지던 거였다. 하지만 교육받은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책임을 생각할 때면 나의 우주에 대한 열망은 침식당하기도 한다. 그 문제의 해법을 찾지 못한 나는, 타인을 돕는 삶을 살지 못한다는 데서 오는 죄책감을 장애처럼 견디며 살아왔다.”

멋진 삶을 산 150명의 흑인 이야기를 모은 ‘Voices of Historical and Contemporary Black American Pioneers’ 2권에 글을 쓴 닐은 “스스로를 속이지 않기 위한 ‘현실 진단(reality check)’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며 이렇게 썼다. “내 아버지나 어머니는 수학이나 과학, 기술 훈련을 받은 적이 없다. 아버지는 사회학자였고, 어머니는 아이들을 기른 뒤 노인학 석사를 받아 보건복지부에서 일했다. 두 분은 내가 (우주를 보면서도) 정치적 사회적 현실 진단을 할 수 있게 해준 기준이었다.”

지난 해 12월 31일, 닐 타이슨은 아버지의 별세를 애도해 준 ‘모든 이들(Twitterverse)’에게 감사를 전하며 트위터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는 89세에 가셨습니다. 애석해하기보다 먼저 그의 흡족했던 삶을 축하해 주십시오(celebrate than to mourn).”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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