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총장ㆍ법무장관ㆍ3선의원ㆍ비서실장
출세가도 김기춘 말년에 법의 심판대 앞에
“朴 대통령 일가와 운명” 발언이 현실로
한때 ‘미스터 법질서’로 불렸던 김기춘(78)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결국 철창 신세를 지게 됐다. 법의 심판대 앞에 서는 위기에 처했을 때마다 법률 지식을 무기 삼아 법망을 잘 빠져 나가 ‘법꾸라지’(법률+미꾸라지) 별명까지 얻은 그였지만, 이번 최순실(61ㆍ구속기소)씨 국정농단 사건에서만큼은 사법처리를 피하지 못했다.
21일 새벽 구속 수감된 김 전 실장의 범죄 혐의는 현 정부에 비판적 성향을 가진 문화ㆍ예술계 인사들을 정부지원에서 배제하기 위한 이른바 ‘블랙리스트’의 작성을 지시했다는 것(직권남용)이다. 사실 지난해 말 검찰 특별수사본부의 ‘최순실 게이트’ 수사 당시에도 그를 둘러싸고 제기된 의혹들은 숱하게 많았다. 고(故) 김영한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비망록에는 김 전 실장이 ‘블랙리스트’ 파문의 꼭대기에 있다고 볼 만한 내용들이 다수 기록돼 있었고, 민간기업인 포스코 회장 선임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정황들도 드러났다.
그러나 뚜렷한 범죄 혐의까진 포착되지 않았고, 검찰도 그를 소환하지 못했다. 때문에 특검 수사에서조차 과연 그가 걸려들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박영수 특검도 임명 직후 가장 어려운 상대로 김 전 실장을 꼽으면서 “그 분 논리가 보통이 아니다”라고 했다. 법적으로 문제가 될 만한 ‘흔적’을 남겨뒀을 가능성이 적고, 수사망이 조여온다 해도 치밀하고 탄탄한 방어 논리를 펼 것이라는 뜻이었다.
이 같은 능력 탓인지 김 전 실장은 박근혜 정부에서 ‘청와대 2인자’가 되기까지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달렸다. 1964년 박정희 정권 시절 검사로 임관해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유신헌법 초안을 마련했고, 중앙정보부에 파견돼 대공수사국장을 지냈다. 뒤이은 전두환 정권 때에는 검사장 자리에 올라 검찰 인사와 예산을 좌지우지하는 검찰국장도 지냈다. 노태우 정권에선 검찰권력 정점인 검찰총장과 법무장관에 올랐다. 공직 퇴임 후에도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를 거쳐 3선 의원까지 됐다.
잠깐의 굴곡은 있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발생한 ‘초원복집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는 법무장관 퇴임 직후인 92년 12월 11일 부산의 초원복집에서 당시 부산 지역 기관장들과 비밀 회동을 갖고 그 유명한 “우리가 남이가, 이번에 안 되면 영도 다리에 빠져 죽자”는 말을 남겼다. 지역감정을 부추겨 대선에서 여당이 승리하도록 하자는 뜻이었다. 당시 검찰은 그를 불법 선거개입 혐의로 기소했다.
하지만 최고의 법률 전문가답게 김 전 실장은 사건 쟁점을 ‘고위 공직자의 대선 개입’에서 ‘불법 도청’으로 틀어 버렸다. 초원복집 사건이 세상에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은 상대 후보 측인 통일국민당 관계자와 전직 국가안전기획부 직원이 식당에 녹음기를 설치해 뒀기 때문인데, 이를 문제 삼았던 것이다. 그는 이에 대해 한국일보가 입수한 미공개 회고록 ‘오늘도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에서 “지인들 간에 흔히 있을 수 있는 대화를 비밀 녹음해서 정치적 대책회의인 양 침소봉대하고 왜곡시켰다”고 썼다. “검찰이 소신 없이 사건화(선거법 위반 혐의 기소)했으나 훗날 (불법도청을 문제 삼은) 헌법재판소 결정으로 법원에서 사필귀정으로 공소가 기각됐다”고도 했다. “내 일생에서 가장 억울한 사건”이라고 했을 뿐, ‘지역감정 유발’에 대한 반성은 전혀 없었다. 법망을 유유히 빠져 나간 사실만 자랑스럽게 언급했다.
김 전 실장은 회고록에서 검찰총장 시절 “내가 항상 법과 질서를 강조했기 때문에 기자들이 ‘미스터 법질서’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구치소에 수감된 채 향후 법정에 수의를 입고 피고인으로 출석, 유ㆍ무죄를 다퉈야 하는 처지가 됐다. 박근혜 대통령도 시점이 문제일 뿐, 직권남용과 뇌물수수 등 혐의로 기소될 것은 확실시된다. “박정희ㆍ박근혜 대통령 일가와의 인연은 운명”이라고 했던 본인의 말처럼, 박 대통령과 함께 법의 심판대에 서게 됐다.
김정우 기자 woo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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