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미국 연방정부에 재단 설립 신청서가 한 통 접수됐다. 설립 목적은 ‘지식의 습득과 공유, 고통의 제거와 예방, 미국인을 포함한 전 인류의 문명 향상과 복지 증진에 이바지하겠다’는 것이었다. 5,000만 달러 상당의 주식과 관련 서류들도 완벽하게 준비됐지만, 좀처럼 정부의 허가가 나지 않았다. 좋은 일에 쓰겠다고 거액의 재산을 내놓은 사람에게 당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어떤 자선을 베풀더라도 재산 축적 과정에서 저지른 악행을 갚을 수 없다”고 독설을 퍼부었다. 연방 정부는 3년 넘게 시간을 끌며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결국 재단은 뉴욕 주의 법인으로 설립돼 활동을 시작할 수 있었다.
대통령으로부터 칭찬은커녕 저주의 말을 들어야 했던 주인공은 미국의 ‘석유왕’ 존 데이비슨 록펠러다. 그의 이름을 붙인 재단이 이후 어떤 일을 했는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 빈곤 퇴치와 의료, 교육, 과학기술 연구, 예술 지원, 그리고 아시아ㆍ아프리카 원조 등에 후원한 돈이 20억 달러에 달한다.
그러나 재단 설립 초기 쏟아진 것은 원색적인 욕과 비난이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가 내놓은 10만 달러의 기부금을 ‘더러운 돈’이라며 거부한 목사도 있었으니, 루스벨트 대통령의 저주가 유별난 것은 아니었다.
록펠러의 냉혹한 사업 방식 때문이었다. 그가 세운 석유회사 ‘스탠더드 오일’은 돈을 버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의회와 관료, 판사를 뇌물로 매수했고, 은밀한 뒷거래로 석유산업의 동맥인 철도를 장악했다. 경쟁사들을 파산시켜 헐값에 사들이는 방식으로 미국 정유 산업의 90%를 독점하는 거대한 재벌이 됐다. 정경유착, 투기, 독점, 담합, 폭력, 노동착취는 록펠러를 상징하는 단어였고, 스탠더드 오일은 미국인이 가장 증오하는 기업이었다.
큰 약점을 가진 기업인이 내놓은 돈, 재단 설립, 정경유착, 대통령의 개입…. 미르ㆍK스포츠재단으로 들통난 박근혜 대통령과 최순실의 국정농단 ‘막장 드라마’와 등장인물이 겹치지만, 결말은 정반대다.
20세기 초 돈이 모든 것을 주무르던 고삐 풀린 자본가의 시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부유한 특권층을 대변하던 미국 공화당 소속이었지만, 검은 돈을 받고 기업가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펼쳤던 전임 대통령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대기업의 병폐 해결에 직접 개입할 것을 천명하고, 그들의 부당행위를 광범위하게 조사했으며, 악명 높았던 기업 트러스트를 해체했다. 1902년 광산 노동자 14만 명의 파업 때는 직장 폐쇄로 맞선 광산업자들을 위협해 사태를 해결했을 정도였다. 이런 대통령이었으니 록펠러의 재단 설립을 반길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미국의 역사가 프레드릭 루이스 알렌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 집권 시기를 ‘양심 혁명’의 시대이며, 미국의 정체성을 결정한 중요한 시기 중 하나로 평가했다.
반면 ‘경영진의 불법행위에 대한 집단 소송제 도입’, ‘대기업 지배구조 개선’ 등 경제민주화를 공약으로 내걸었던 박근혜 대통령은 취임 이후 정 반대의 길을 걸었다. 대기업의 돈을 걷어 청년희망펀드, 창조경제혁신센터 등 자신의 치적 만들기에 사용했고, 최순실의 돈벌이 수단이었던 미르ㆍK스포츠재단은 온갖 편법을 동원해 급조했다. 기업의 약점을 잡아 기금을 마련했으니 경제민주화는 말도 꺼내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다.
또다시 대선의 계절이 다가오면서 많은 대선 주자들이 재벌 개혁을 외치고 있다. 정경유착의 검은 고리를 끊어야 한다며 기업들을 꾸짖기도 한다. 구구절절 옳은 말인데도 공허하게 들리는 건 권력을 잡은 뒤 돌변하는 정치인들의 모습 때문이다. 개혁을 무기 삼아 기업에게 ‘갑질’하는 재미에 빠지고, 그럴듯한 명분으로 재단 하나 만들어 곳간 채우는데 기업을 동원하는 모습 말이다.
현실적으로 쉽진 않겠지만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 기업에게 손 벌리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대선후보를 보고 싶다. 재벌 개혁이건, 정경유착 근절이건, 내가 변하는 게 먼저다.
한준규 산업부 차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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