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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나의 대만, 그리고 펑퀘이의 아이들

입력
2017.01.19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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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동네에 화교가 운영하던 중국집이 있었다. 둥그런 얼굴의 말없는 부부가 있었고 장성한 아들이 일을 도왔던 것 같다. 손님이 집에 오면 냄비를 들고 가서 간짜장을 받아온 기억도 있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용돈을 모았다가 가끔 간짜장을 먹으러 갔다. 볶은 양파랑 고기가 듬뿍 들어 있고 계란 프라이가 올려져 있는 간짜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음식이었다. 그때는 자유중국이라고 불렀는데, 붉은 바탕에 푸른 하늘의 흰 태양을 빛 줄기와 함께 그려놓은 대만 국기와 군복을 입은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사진이 식당 안쪽 상단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당시 한국은 자유중국과 수교하고 있던 많지 않은 나라 중의 하나였다. 올림픽에서 자유중국이 중국의 압력으로 자신들의 국기를 사용하지 못하는 걸 보고 마음이 아팠던 기억도 있다. 같은 분단국가인데다 오랜 군부독재와 일본 식민지 경험도 공유하고 있는 터라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특별히 가깝게 느낄 요인도 많았던 것 같은데 그때는 그런 것까지 생각은 하지 못했고, 그저 늘 옆에 있는 이웃처럼 친숙하게 여겼지 싶다. 1992년 ‘죽의 장막’이라 불리던 대륙의 중국과 전격적으로 수교하고 대만과 단교하게 되었을 때 대만 사람들의 배신감이 유독 컸다고 하는데, 국익 운운하는 국제정치의 질서는 사람살이의 도리 따위와는 별 상관이 없는 일이었을 거다.

대만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은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 등이 중심이 된 80년대 대만 뉴웨이브 영화를 뒤늦게 접하게 되면서였다. 흔한 홍콩 영화인 줄 알고 아무 생각 없이 극장에 들어가서 보았던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비정성시’(1989)에 본성인과 외성인의 갈등으로 촉발된 ‘2·28사건’이라는 대만 현대사의 참혹한 역사가 배경으로 깔려 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한참 뒤의 일이었다. 무엇보다 성장기 4부작으로 일컬어지는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펑퀘이에서 온 소년’(1983), ‘동동의 여름방학’(1984), ‘동년왕사’(1985), ‘연연풍진’(1986)을 뒤늦게 보면서 만난 대만의 풍경과 사람살이의 모습은 내게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아주는 듯한 착각마저 주었다. 겉치레의 예술적 장식 없이 대만인이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는 시간을 사실과 시정(詩情)이 어우러진 진실의 이미지와 이야기로 포착해낸 그 영화들에서 나는 나 자신의 부서지고 단절된 시간을 위로 받고 있는 느낌을 받았고 동아시아 공통의 역사적 시간과 경험, 그리고 풍경을 가슴 저리게 다시 만났다.

정초에 며칠 대만 여행을 다녀왔다. 처음이었다. ‘비정성시’의 촬영지로 알려진 타이페이 북동쪽 해안 고산의 금광마을 주펀과 진과스를 찾았고 핑시선(平溪線) 협궤 열차를 타고 아열대 삼림과 산중 터널을 달려 ‘연연풍진’의 소년과 소녀가 학교에서 돌아와 내리던 시펀역에도 가보았다. 카오슝 남쪽에 있는 줄 알았던 펑퀘이는 대만 서해 펑후 제도의 작은 어촌 마을이었다. 배로는 대만 남부 항구도시 카오슝(高雄)까지 9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타이페이에서 비행기를 타니 50분 남짓 걸렸다. 펑후 섬 안에서도 펑퀘이는 한참 외곽이었다. 아버지가 의자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던 마당, 펑퀘이의 소년이 살던 집은 세월을 비껴 그대로 있었다. 옆집 사이로 난 골목에서 가족이 밥을 먹던 장면이 떠올랐다. 집 앞 바닷가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망망대해였다. 바다를 보며 소년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카오슝은 얼마나 먼가. 그들이 바다를 건너 카오슝으로 다시 타이페이로, 그렇게 세상을 향해 갔던 길은 무엇인가. 그 소년들도 지금은 내 나이쯤 되었으리라. 펑퀘이에서 마궁(馬公) 시까지 버스를 타고 나오는데 토요일 오후여서 그런지 시내로 놀러 나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의 손에는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이럴 때는 살아가는 일이 그냥 느꺼워지고 기적 같게만 여겨진다. 벌써 대만에서의 며칠이 꿈같다.

정홍수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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