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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을 쇼핑한다, 고로 존재한다."

입력
2017.01.1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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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킹 참가자들이 해 저문 아차산에 올랐다. 뜨겁고 치열하기만 했던 도심의 불빛도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니 아득하다. 프립 제공
하이킹 참가자들이 해 저문 아차산에 올랐다. 뜨겁고 치열하기만 했던 도심의 불빛도 한 발 떨어져서 바라보니 아득하다. 프립 제공

쉴 때 뭐하냐고? 휴식, 여가, 취미라. 그게 다 뭔데. 먹는 거임? 작가들 노상 새벽퇴근인걸 알면서 왜 물어. 가끔이라면 늦잠, 떡실신, TV시청! 이불 밖이 위험한 건 둘째 치고 기운이 없어. 그 재미 몰라? 애는 개그맨이 키우는 거 구경하고, 캠핑은 가수, 배우가 즐기는 거 쳐다보기. 왕왕 억울하긴 하더라.

참, 저번엔 간만에 우리 프로그램 결방이 됐는데 설레긴 했지. 갑자기 주어진 휴가, 뭘 해야 생산적일까. 영 안 해본 일로 기분전환 하면서, 여행처럼 큰 돈까진 안 드는 게 뭘지. 내 말이! 어쩌다 쉬라니까 노는데도 ‘가성비’를 찾게 되더라니까. 눈에 들어온 게 집 근처 원데이클래스, 가죽공예 알지? 꽃꽂이만큼 흔하지도 않고, 두고두고 ‘내가 이런 것도 만들 줄 알아. 에헴!’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

6, 7시간쯤 배우는데 재료비까지 내니 대단히 싸진 않지. 10만원쯤. 그래도 마냥 신기해서 한 번쯤은 할 만 하더라. 그러니까 좋은 거지. 학원처럼 계속하라면 돈도 돈인데 시간이 어디 있어. 질릴 수도 있고. 또? 응. 다시 할 생각은 있지. 다음엔 카드지갑 만들어서 주위 선물할 때 쓸 거야. 기왕 돈 쓰는 거, 내가 직접 하는 거잖아. 이름도 새길 수 있고. 하루 체험으로 그럴듯한 결과물 내놓는 맛이지. 그래, 딱 하루치의 ‘넘나’ 뿌듯한 것!

파란 가죽을 원하는 모양으로 재단하고 정성껏 만지다 보면 나만의 가죽 파우치가 완성된다. 선하리씨 제공
파란 가죽을 원하는 모양으로 재단하고 정성껏 만지다 보면 나만의 가죽 파우치가 완성된다. 선하리씨 제공

겉핥기? 얼마나 금쪽 같은 하룬데!

바야흐로 원데이클래스 르네상스다. 수업료 5,000원부터 10만원 대까지. 방송작가 선하리(32)씨가 빠진 가죽공예부터, 제과제빵, 내 반려동물 초상화 그리기, 댄스스포츠, ‘인생샷’ 찍는 법, 야간 하이킹까지. 맛보기 힘든 취미가 드물 정도다. 갖가지 수업이 성업하는 가운데 지난해부터는 원데이클래스만 모아 소개하는 전문 사이트가 신설됐고, 직접 내가 호스트로 수업이나 모임을 개최할 수 있는 서비스도 등장했다.

지난해 3월 어플로 출시된 소셜 액티비티 플랫폼 '프립(Frip)'은 하루 단위로 참여할 수 있는 각종 클래스 및 체험활동을 개설했다. 출시 이후 매달 가입자 증가율이 평균 27%에 달한다. 현재 회원은 25만 명 수준이다. 박아름 프립 마케팅팀장은 “높은 사회적 긴장도 때문에 직장인이나 대학생 대부분이 여가시간을 스마트기기에 몰입하거나 음주, TV 시청 등으로만 활용하는 점에 착안해 여러 프로그램을 시도했는데 반응이 좋았다”며 “주요 고객은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으로 무료한 주말, 퇴근 후를 즐기고 싶은 직장인 등이 많다”고 했다.

“2030세대의 여가생활에 대한 갈증은 이전부터 존재했잖아요. 다만 경제 성장 둔화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불안도 높아지고 사회 전반적으로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는 경향이 높아져, 이제는 다들 ‘지금 내가 행복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는 게 아닌가 싶어요.”

현재의 행복, 여가에는 목말랐지만 마냥 즐길 돈도 시간도 없는 사정이 만나 흥하는 절충안이 ‘하루 체험’인 셈이다. 시장조사회사 마크로밀엠브레인이 2015년 7월 전국 성인남녀 2,000명에게 실시한 조사에서 ‘항상 시간이 없다’고 답한 응답자는 전체의 27.6%, 이 중 1위는 30대(35.4%), 2위는 20대(31.2%) 였다.

지난해 2월부터 큐레이션 포털인 ‘원데이모아’를 운영 중인 조세은(35) 대표는 “2030세대의 상황이 장기강좌 개념으로 취미생활을 접근하기에는 시간적, 금전적으로 모두 부담스러운 경우가 많아 부담이 없는 클래스를 선호하는 것 같다”며 “매달 600~800개 클래스가 등록된다”고 했다. 빠듯한 시간 속에서도 성취감과 만족감을 얻을 수 있는 일종의 ‘패스트 힐링’이다.

'반려동물 팝아트 초상화' 그리기에 나선 참가자의 작품. 주인의 애정 어린 콩깍지 덕인지 그림이 실물보다도 더 귀엽다. 풍뎅이의 숲 제공
'반려동물 팝아트 초상화' 그리기에 나선 참가자의 작품. 주인의 애정 어린 콩깍지 덕인지 그림이 실물보다도 더 귀엽다. 풍뎅이의 숲 제공

물질에서 경험으로, 기준이 바뀐다

뭐든 물건만 사서 쓰기보다 직접 해보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2030세대의 소비성향도 중요한 변수다. 반려동물 초상화 그리기 클래스를 운영 중인 ‘풍뎅이의 숲’의 성현아(28) 대표는 당초 팝아트 작품을 판매하다가 “직접 내 강아지를 그려서 사고 싶다”는 이들의 요청으로 1년 반 전부터 수업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완성도는 주문 제작 후에 사가기만 하는 게 더 높을 수도 있는데, 대부분 본인이 직접 그리는 걸 선호해요. 빠듯한 시간을 낸 직장인들인데도 퇴근 후 늦은 시간에 와서 3시간 정도 그림을 그리다 보면 신기하게 스트레스가 해소된다고들 해요. 딱 한 번이지만 와서 뭐라도 얻어가는 기분이라고요.”

소유를 통해 남에게 보이는 모습보다 스스로의 경험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경험소비 선호’는 밀레니얼 세대의 큰 특징이다. 메타트렌드연구소는 분석서 ‘트렌드싱킹’에서 “이제 소비의 목적은 제품이 아니라 경험”이라고 정의했다.

회사원 박효정(27ㆍ가명)씨는 ‘경험 is 뭔들’을 외치며 각양각색의 수업을 찾아 다니는 대표적 경험소비자다. 2011년 처음 들은 ‘클래식의 역사’ 강좌를 시작으로, 영화의 역사, 바로크 미술, 한국사 맛보기, 한국무용, 필라테스, 홈베이킹, 드로잉, 사진, 캘리그라피, 양모펠트 등 각종 원데이클래스를 섭렵했다. “무턱대고 정규강좌부터 신청하면 자신과 맞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원데이로 맛만 보는 게 좋았어요. 하루라 부담이 없기도 하고, 평소 접해보지 못한 것들을 하면서 흥미롭고 기분 전환도 되고요.”

남상욱(40) 착한사진연구소 대표는 10여년째 사진 관련 원데이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2030세대를 대상으로 한 '스마트폰으로 쉽고 편하게 인생샷 배우기' 강의가 인기다. 남상욱 대표 제공
남상욱(40) 착한사진연구소 대표는 10여년째 사진 관련 원데이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에는 2030세대를 대상으로 한 '스마트폰으로 쉽고 편하게 인생샷 배우기' 강의가 인기다. 남상욱 대표 제공

여가 때도 ‘관계 스트레스’는 No!

시간과 돈은 물론 관계로부터 오는 압박에서 자유롭다는 점도 원데이클래스의 한 매력이다. 야간에 수원화성, 인왕산 등에 올라 야경을 즐기는 ‘야(夜)한 하이킹’ 클래스를 운영 중인 김승규(36)씨는 “동호회는 아무래도 소속감을 강조하고 각 단체마다 룰과 규정이 있는 반면, 하루 프로그램의 경우 더 가볍게 ‘가고 싶으면 가고 아니면 말고’하는 마음으로 찾아 오는 분들이 많다”고 했다. 프로그래머로 일하는 그는 일상탈피를 위해 짬을 내 등산을 즐기면서부터 산림청 숲사랑지도원으로 봉사활동을 시작했고, 야간 클래스도 운영 중이다. 참가비는 5,000원.

“소위 등산동호회라고 하면 안 좋은 인식도 많은데 대부분 산악회는 정말 건전하거든요. 친구 가족과 가볍게 올라 야경을 즐기는 코스와 스트레스 해소법을 소개해요. 매주 화요일 진행하는데 평일 밤에 6~10명 정도가 참석하죠. 2030세대의 소비심리는 바짝 위축돼 있지만 건강, 꿈, 즐거움에 시간을 투자하는 데는 더 적극적인 것 같아요.”

박아름 팀장 역시 관계 스트레스로부터의 자유를 원데이클래스 흥행의 배경으로 꼽았다. “동호회 같은 소속감이 없기 때문에 관계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없잖아요. 해보고 싶은 것들을 모두 스스로 찾고, 같이 할 사람을 구하던 고생이 필요 없는 거죠. 이제는 혼자서라도 결재만 하면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들이 즐비하니까요.”

취업전쟁, 승진경쟁, 내 집 마련, 육아 등으로 늘 쫓기듯 살면서도 취향과 재미, ‘있어빌리티’만큼은 포기할 수 없는 2030세대의 수요를 각종 체험 수업들이 채우고 있는 셈이다. 다시 ‘소유의 시대’가 돌아오지 않는 한 놀이하는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들이 체험 쇼핑은 당분간 계속 될 전망이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변해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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