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할 오늘] 1.19

체코 프라하 찰스대에서 역사와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던 21세 얀 팔라흐(Jan Palach)가 1969년 1월19일 숨졌다. 그는 16일 프라하 바츨라프 광장 인근 체코국립박물관 앞에서 분신했다. 그의 분신은 동기 등을 둘러싼 몇 가지 엇갈린 해석을 낳았고, 그 의문들로 체코 시민들을 더 아프게, 더 분노하게 했다.
한 해 전인 68년 8월 바르샤바조약군이 프라하를 점령했다. 두브체크 등이 주도하던 개혁ㆍ개방의 ‘프라하의 봄’이 그렇게, 7개월 만에 짓밟혔다. 팔라치의 분신은 소련, 곧 러시아의 제국주의적 억압에 대한 항의의 희생이라 알려졌다. 시민ㆍ학생들의 시위가 이어졌다. 약 한 달 뒤 팔라치가 쓰러진 같은 자리에서 또 한 명의 대학생 얀 자이츠(Jan zajic)가 분신했고, 두 달 뒤에도 프라하 남동쪽 비소치나 주 이흘라바에서 에브젠 플로첵(Evzen Plocek)이 목숨을 내던졌다. 그들 앞에는 외국 군대의 탱크들이 버티고 있었다.
찰스대 병원으로 후송된 팔라치를 경찰이 뒤따랐다. 배후와 동조자를 캐내기 위해서였다.팔라치가 가담한 비밀 분신조가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진위는 지금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를 담당했던 의사 야로슬라바 모셀로바(Jaroslava Moserova)는 팔라치가 소비에트보다 체코 시민들에게, 그들의 무기력에 항의하기 위해 분신한 거였다고 말했다. 모셀로바는 “패배만 한 게 아니라 포기해버린(not only giving up, but giving in) 듯한 시민들의 풀죽음(demoralization)에 저항하고자 그는 제 몸을 불사른 거였다. 슬픈 눈과 무거운 얼굴로 조용해져 버린 거리의 시민들을 보면, 모든 고귀한 사람들이 현실과 타협하려 한다는 걸 알 수 있지 않은가.” 그것이 정말 팔라흐의 뜻이었는지, 모셀로바의 해석이었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체코 시민들도 그(들)의 죽음을 무겁게 간직했다. 그들은 잊지 않았다.
팔라치가 숨지기 직전 여자친구와 학생운동 지도자를 병실로 불러 “더 이상의 희생은 없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유언처럼 남겼다는 말도 있지만, 그 역시 확정적인 사실은 아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지도 의문이다. 그는 당일 오후 3시 30분 별세했고, 벨벳 혁명 이후 체코 시민들의 뜻으로 광장의 얼굴로 되돌아왔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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