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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세한정을 찾아서

입력
2017.01.18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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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가 양평군 두물머리다. 북한강과 남한강의 만나는 곳이다. 두물머리에 가면 들르는 곳이 세미원이다. 여름에 가면 연못에 가득한 연꽃들이 탄성이 나올 만큼 아름답다. 여기 세미원에는 ‘세한정(歲寒庭)’이란 곳이 있다. 국보 제180호인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와 조성한 정원이다. ‘세한도’의 두 주인공인 추사와 제자 이상적의 의리를 기리는 글과 그림을 만날 수 있다.

‘세한도’는 추사가 정치적으로 좌절한 제주도 유배 시절에 그린 작품이다. 그의 쓸쓸한 마음과 그 쓸쓸함을 견뎌내려는 의연한 정신이 잘 담겨 있다. 작품 속 소박한 초옥 한 채와 소나무·잣나무 몇 그루가 고적한 한겨울의 느낌을 안겨준다. 동시에 삶의 고난을 극복하려는 고결한 기품을 떠올리게 한다. 의연한 정신과 고결한 기품은 이 작품을 감싸 도는 아우라를 이룬다.

작품 뒷면에는 추사가 적은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권력이 있을 때는 가까이하다가 권세의 자리에서 물러나면 모른 척하는 것이 보통이다. 내가 지금 절해고도에서 귀양살이하는 처량한 신세인데도 이상적이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런 귀중한 물건을 사서 부치니 그 마음을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권력이나 재물을 잃은 때에도 나를 좋아하고 곁에 있어 주는 이가 진정한 친구다. 추사에겐 제자인 역관 이상적이 그런 인물이다. 중국에서 귀한 책을 구한 이상적은 그 책을 권력자가 아닌, 귀양살이를 하는 스승에게 선물했다. 추사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앞서 인용한 구절에 이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공자는 ‘세한연후(歲寒然後) 지송백지후조(知松柏之後凋)’라 했으니, 그대의 정의야말로 추운 겨울 소나무와 잣나무의 절조(節操)가 아닐까.” ‘세한연후 지송백지후조’란 추운 계절이 돼야 소나무·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는 뜻이다. ‘논어’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찾아오는 이 거의 없는 제주도 대정으로 유배 와서야 추사는 새삼 권력과 인간과 의리에 대해 깨닫게 된 듯하다. 그리고 소나무·잣나무 같은 제자 이상적의 아름다운 절조를 칭찬하고 있다.

나는 전통사회를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조선 시대의 가부장주의는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한도’에는 감동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까닭은 어려운 시절에 나누는 의리와 사랑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사람은 누구나 견디기 어려운 일을 겪게 될 때가 있다. 고통을 겪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여전히 내 곁을 지켜주는 존재다. 지지해 주고 위로해 주는 친구가 있는 사람은 고통 가운데서도 힘과 용기를 얻지만, 함께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이들은 낙심과 절망의 정도가 몇 배 더해진다.

오늘날 현대사회에서 넘치는 것은 아는 이들과의 관계다. 문제는 아는 사람이 많아도 친한 사람은 없다는 점이다. 정보사회의 진전이 가져온 역설적인 사회적 결과다. 휴대폰 전화부에 아는 이들의 연락처가 빼곡히 저장돼 있어도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이들은 갈수록 줄어드는 ‘과잉 연결 속의 과소 친밀’이 우리 시대의 또 다른 모습이지 않을까.

인간은 본래 외로움을 느끼는 존재다. 이 외로움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넘치는 과잉 연결이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인간적 친밀성이다. 친밀성은 추상적인 게 아니라 구체적인 것이다. 우리 인간은 그렇게 대단한 존재가 아니다. 외로울 땐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서로의 속 깊은 마음을 나누는 것만큼 좋은 치유는 없다. 너무나 많은 연결은 때로는 우리를 지치게 하고, 외려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정말 중요한 존재는 어떤 순간에도 내 곁을 지켜주는 소중한 벗이 아닐까.

한겨울의 절정이다. 온기가 그리운 시간이다. 휴대폰을 꺼둔 채 친구와 함께 세한정으로 바람을 쐬러 가고 싶은 날이다.

박상희 샤론정신건강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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