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해양 테마파크 시월드에서 쇼를 하던 범고래 틸리쿰이 죽었다. 뒤숭숭한 시절에 남의 나라 고래 한 마리의 죽음이 대단할까 싶지만 틸리쿰은 사람들의 돌고래 쇼에 대한 인식을 뒤흔든 존재라 특별하다(물론 어떤 변화로 나타날 지는 아직 속단하기 어렵다). 틸리쿰은 1983년 두 살 무렵 아이슬란드의 바다에서 포획되어 돌고래 쇼를 하고, 정자를 제공하는 번식용 돌고래로 30년 넘게 수조에 갇혀 살았다. 그 사이 3명의 인명 사고와 연루되어 ‘살인고래’로 불리기도 했지만 갇힌 고래에 대한 실상이 밝혀지면서 누구도 틸리쿰을 비난하지 못했다.
틸리쿰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블랙피쉬’를 통해 쇼를 하는 범고래들의 실상이 드러났다. 틸리쿰의 공격적인 행동은 지능과 사회성이 높은 범고래가 야생의 100만분의 1에 불과한 좁은 수조에 갇혀 학대에 가까운 훈련을 받은 것이 원인임이 드러났다. 범고래는 다른 고래도 잡아먹는 육식고래이지만 야생에서 인간을 죽이거나 먹은 사례는 없다. 인간에게는 호기심만 보일뿐 공격하지 않는다. 범고래는 사회적인 동물로 세대를 거치면서 사냥의 기술과 방법을 배우는 ‘문화’가 있는데 무리로부터 배우지 않은 먹이는 먹지 않는 습성 때문일 것이다.
얼마 전 인터뷰 때 기자가 동물권이 뭐냐고 물었다. 확실히 이 시대의 인간은 동물의 범주에서 멀리 도망가 있구나 싶었다. 인권이 인간으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보편적인 권리라면 동물권도 마찬가지이다. 타고난 습성대로, 타고난 수명만큼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 권리. 범고래가 범고래로 살 권리. 얼마 전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를 보면서 ‘블랙피쉬’를 떠올렸다. 타자의 고통을 깊숙하게 이해하기. 타자의 수치심까지 고려하지 못했던 나는 생리대가 시급한 빈곤 여성, 가르친 대로 따라하지 못한다고 물고기를 얻어먹지 못하고 굶겨진 채 가둬지는 틸리쿰의 모습에 편한 의자에 앉아 숨을 쉬는 것조차 불편했다. 여성을 여성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폭력, 범고래를 범고래로 살지 못하게 하는 폭력.
두 영화 모두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누구도 일어나지도 말을 꺼내지도 못했다. 긴 침묵. 힘이 없어도 수치심을 갖지 않고 사람으로, 범고래로 살 수 있는 세상이 올까. 지금과 다른 세상이 가능할까. 그런 세상은 약자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주는 선한 이웃, 인간의 언어를 갖지 못한 고래의 말을 대신해주는 인간을 통해 가능하다고 영화는 말하고 있었다.
독일의 동물학자 비투스 드뢰셔는 ‘하이에나는 우유배달부’에서 해양생물학자 윈스럽 켈로그의 돌고래 연구를 소개한다. 돌고래 무리를 찾아다니며 관찰한 결과 돌고래 소리는 스펙트럼이 엄청나게 넓다는 걸 알아내는데 수족관에서 훈련을 받는 돌고래의 소리도 관찰했다. 조련사가 돌고래를 뛰어오르게 하기 위해서 물고기를 흔들다가 돌고래 코앞에서 물고기를 빼앗자 돌고래는 가슴을 찢는 듯한 고통스러운 소리를 내뱉었다. 쇼를 하는 동물들은 인간의 곁에서 그렇게 산다.
동물 쇼는 관람객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으로 유지된다. 나도 그 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15년 전 부모님과 떠난 미국 여행길에서 범고래 공연을 봤다. 동물 쇼에 대해 무지했던 시절의 나는 범고래가 일으키는 거대한 물보라를 맞으며 즐거워하시는 부모님을 보고 기뻤다. 돌고래 쇼는 여전히 우리나라의 대도시, 관광지마다 빼놓지 않고 자리 잡은, 흥행하는 오락 산업이다. 아직도 한국에는 수많은 틸리쿰들이 살고 있다.
틸리쿰은 인간의 노예로 살다가 비로소 자유를 얻었다. 죽고서야 얻은 자유.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 범고래의 사냥 장면은 굉장히 멋지다. 힘과 속도, 창의력과 협동심 등 빼어난 신체적, 정신적 능력을 보여준다. 지금쯤 틸리쿰은 그런 멋진 사냥을 하고 있을까. 틸리쿰은 인디안 말로 친구라는 뜻이다. 글쎄, 인간이 돌고래의 친구가 될 자격이 있을까. 비투스 드뢰셔는 과학 잡지 ‘뉴사이언티스트’의 글을 인용하면서 책을 시작한다. 지구에서 원자폭탄이 폭발하는 것을 본 베드로가 신에게 하는 말이다. “지구를 차라리 돌고래에게 맡기면 좋았을 걸 그랬어요” 이 말에 찬성표를 던진다.
김보경 책공장더불어 대표
참고한 책: ‘하이에나는 우유 배달부’, 비투스 드뢰셔, 이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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