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동네 친구는 자전거를 타고 나타났다. 머리에는 귀를 살짝 가릴 정도의 작은 헤드폰이 얹혀있었고, 헤드폰 줄은 어깨를 타고 허리춤까지 내려와 낯선 음향기기에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비포장 신작로를 걸어 하교를 하던 까까머리 중학교 2학년생이었다. 마치 왕이 신하에게 하사하듯 친구가 여유 가득한 얼굴로 헤드폰을 벗어 내 귀에 얹어주었다. 지구의 자전소리를 듣게 된다면 이런 충격일까.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가 뿜어내는 소리를 처음 들었다.
그전까지 우리 집에는 전축도 있었고 카세트 플레이어도 있어서 음악을 그래도 많이 접한 나였지만, 귀에 딱 붙어서 그런지 소리가 내 몸 전체를 덮는 느낌은 처음 경험하는 것이었다. 세밀하게 좌우로 구분되어 들려오는 스테레오의 세계. 소리가 이렇게 입체적일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순간이었다.
그날부터 부모님에게 휴대용 카세트를 사달라고 조르기 시작했다. 그게 있어야 영어를 영어답게 공부할 수 있다는 억지 주장에 부모님이 설득 당했다. 친구의 세련된 외국산 대신 약간 투박하게 생긴 국산 제품을 구입했다. 재생 버튼을 눌렀을 때의 그 청량한 소리를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친구 것과 비교해도 그다지 차이가 나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우리 마을에서 처음으로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가지게 되었다.
영어 교과서 내용이 그대로 담긴 카세트테이프를 늘어지도록 들었다. 발음이 교정되고 어휘를 많이 익히게 되었다. 팝송을 듣는 것도 영어공부라고 쳐준다면 나는 정말 죽도록 영어공부를 한 셈이다. 팝송 가사를 많이 외웠고 그 문장들을 나중에 커서 실전 영어에 많이 사용하는 재미도 누렸다.
세월이 흘러 LP음반이나 카세트테이프가 CD로 변했다. 바늘이 긁히는 소리나 테이프가 늘어진 소리가 들리지 않는 무결점의 소리는 새로운 세계였지만, 그래도 내 평생 가장 멋진 소리는 먼지 이는 신작로에서 들었던 휴대용 카세트였다.
취업을 하고 첫 월급으로 오디오를 사들였다. 가끔 듣는 LP와 자주 듣는 CD가 한쪽 벽을 장식하는 풍경에 무척 행복했다. 달리는 자동차에서 듣는 CD는 또 하나의 충만한 소리였다. 늦은 밤 극장에서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고 그 OST를 들으며 한강 다리를 건너던 시간은 천국의 시간을 잠깐 당겨온 경험으로 남아있다.
MP3의 등장은 인간 생활의 지극히 자연스런 변화다. 이 극적인 휴대성 앞에서 사람들은 기존의 소리를 쉽게 어깨 뒤로 던졌다. 우선 소리의 질감에서 진중함을 잃었다. MP3는 사람의 귀가 원하는 소리만큼만 표현한다. (무손실 음원도 있지만 용량이 커서 대중적인 이용에는 한계가 있다.) 그 너머의 숨겨진 소리를 없앤 것은 마치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마음을 놓치고 외모만 보는 것 같이 느껴진다. 그리고 LP, 카세트테이프, CD가 갖고 있던 인간의 손때 묻은 모습, 즉 소리의 외형을 잃어버렸다. 이제 음반에 글씨를 적어 선물하는 모습은 거의 사라졌다. 소리의 선물은 디지털 기기들 사이로 날아다닐 뿐,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는다. 마음을 담기가 그만큼 어려워졌다. 인간이 소외의 방법을 적극 찾아 나서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편리가 주는 함정은 편리의 정도만큼 깊다.
자동차의 엔진음이나 배기음도 스피커에서 재생되는 시대에 이르렀다. 자연흡기 엔진에 터보를 달아 크기와 무게를 줄이고 연료 효율을 높였다. 그만큼 자동차 본연의 소리를 잃었다. 효율을 우선시 하는 시대의 요청에 따른 결과다. 효율과 편의를 마음이라는 대가를 주고 사야 하는 세상을 우리는 산다. 얼마만큼 적절한 소비를 해야 할지 균형을 잘 모색해야 하겠다. 내가 처음으로 헤드폰을 귀에 대고 음악을 듣던 날처럼 그런 감흥이 많을수록 인생의 행복은 쌓이지 않을까. 무손실 음원처럼 ‘무손실 감성’을 내세우는 제품이 미래에는 강세지 않을까 하는 상상도 해본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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