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루엘(Teruel)에 진입하자 낯선 도시에 대한 의문은 한층 커졌다. 먼 산간 지방이란 지리적 취약만으로 그렇게 외면당해 왔던가. 광장 카페 테라스에서 허세를 부리며, 테루엘을 변호하는 물증을 써 내려 갔다.
무엇을 봐야겠다는 강박을 가진 건 아니었다. 등을 떠민 건 도리어 테루엘 쪽이다. 길 따라 변방의 정서로 도배된 긴장의 공백은, 이슬람의 기교가 섞인 무데하르(Mudejar) 건축물을 모조리 섭렵하리라는 날 선 결심으로 채워졌다. 해발 915m 고원에서 440.41㎢ 몸집 안에 쫀쫀한 자산을 축적한 도시. 긴장과 긴장 없음은 늘어진 테이프처럼 무한 반복됐다.
테루엘 여행은 광장에서부터 가지 친 골목을 들락날락해야 한다. 작은 황소상이 있는 토리코 광장(Plaza del Torico) 주위는 유네스코에서 문화유산으로 인정받은 늠름한 무데하르(Mudejar) 4대 건축이 호위하듯 서 있다. 명실공히 아라곤(Aragon) 지방의 주도다운 맵시를 갖췄지만, 교통은 취약하다. 220km 떨어진 마드리드에서 그 흔한 기차조차 닿지 않아 짭짤한 관광 수입을 올리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번 거쳐간 길은 반드시 다시 밟게 되는 운명적인 부메랑의 테루엘. 체류하는 내내 지난 99년 이곳에서 벌어진 캠페인의 부활을 꿈꿨다. ‘Teruel extiste’ 그래, 테루엘은 이렇게 살아 있노라고.
테루엘다움의 미니어처, 테루엘 아만테스 재단(Fundación Amantes de Teruel)
벽돌이 이리도 섬세하고 매력적인가. 도둑고양이인 양 재단을 빙글빙글 돌며 살핀 연유다. 테루엘은 무데하르 건축 양식에 충실하다. 12~15세기경 무어인(아랍계 이슬람교도)의 손맛이 기독교의 건축에 맞춰 풀어진 이 양식은 벽돌을 찬양하고 있다. 테루엘 아만테스 재단은 무데하르 건축의 결정판이라 할만하다. 스페인의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표방하는 아만테스 영묘(Mausoleo Amates)를 지나 산 페드로 교회(Iglesia de San Pedro)와 그 회랑(Claustro), 정원(Ábside y jardín de San Pedro)을 거쳐 탑(Torre San Pedro y Ándito)으로 오르는 동선을 멋스럽게 담아냈다. 의외로 안과 밖에 안배된 복도가 주는 감동이 섬뜩할 정도다. 산 페드로 교회의 회랑부터 정원까지, 종탑으로 에둘러 가는 길 모두.
인내의 단맛, 엘 살바도르 탑(Torre de El Salvador)
인사하듯 허리를 구부린 건물 사이로 치솟은 엘 살바도르 탑. 14세기 미인형 무데하르 양식이다. 청록색과 흰색 타일, 벽돌만으로도 강경한 화려함을 뽐낸다. 내부는 어둠과 빛, 수직과 수평의 조화다. 어둠 속에 난 122개 계단이 수직을 향하고, 간헐적인 박물관이 빛을 쪼이며 수평적인 층을 이룬다. 다리가 후들거릴 때쯤 종탑이었다. 동서남북으로 난 벽돌 창으로 테루엘이 바람과 함께 달려온다. 오렌지 빛 지붕은 하늘 아래 엎드려 있고, 마을을 에두르는 산허리가 이어진다.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어둠이 있고 난 뒤에야 찾아온 빛, 고진감래를 가르쳐주는 탑이다.
한 입만 더! 과식한 지 1시간째, 사라토(Cafetería Sarato)
테루엘에서 맛으로 인정받는 게 건조한 햄(cured ham)이다. 돼지고기류 중에서도 테루엘 산 햄이라면 입부터 갖다 댄다. 사라토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장년이 버글버글하는 논스톱 레스토랑 겸 바다. 한 테이블엔 커피를 무한 리필하는 수다 모임이, 다른 테이블엔 독주로 얼굴이 벌건 마초 집단이 점유하는 무규칙 이종 공간이다. 오후면 길게 혀를 뺀 바에 전시된 타파스(빵이나 비스킷 위에 갖은 재료를 척척 쌓은 애피타이저 겸 안주)가 침샘을 자극한다. 타파스로 슬슬 식욕을 찾던 위장은 얇게 저민 햄으로 절정을 맞이한다. 빵이나 비스킷에 토마토 퓌레와 곁들여도 좋지만, 역시 단독으로 맛보는 게 최강. 혀끝에 말리며 사르르 녹는다. 영수증을 보면 타파스라도 하나 더 먹을 걸 아쉽다. ‘먹으면 먹을수록 식욕이 더 난다’라는 스페인 속담을 이해할 것 같은 기분이다.
예상 밖 숨은 진주, 테루엘 지역 박물관(Museo Provincial de Teruel)
공짜여서 시간 때우기로 들어갔다. 16세기 옛 왕궁을 박물관화했다지만, 베이지톤 네모꼴 외관이 기대를 준 것도 아니다. 반전이다. 지하부터 5층까지 테루엘의 역사를 다룬 콘텐츠 양에 마음이 바빠진다. 테루엘의 생로병사를 녹인 삶을 층마다 시간과 주제별로 스토리텔링한다. 무엇보다 지루할 틈이 없다. 실제 고고학 소장품부터 의식주를 재연한 모형까지 오브제와 영상, 사진 등 전달 방법을 총동원해 관람객이 그 시대에 서 있게 한다. 도자기가 테루엘의 자랑인 만큼 그 뿌리인 13~15세기 도자기 제조술에 발길이 오래 머문다. 테라스에 그림처럼 걸린 테루엘은 유난히 중세 풍의 디즈니월드 같다. 기본 1시간은 잡아야 한다. 얼마나 더 길어질진 아무도 모르므로.
강미승 여행칼럼니스트 frideameetssomeone@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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