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의 별명이 기름장어라는 걸 가장 열심히 알린 사람은 뜻밖에도 그 자신이다. 그는 취임 전 서울대 강연에서, 뉴욕의 특파원들과 만난 자리에서 별명의 유래와 의미를 적극 홍보했다. 미국 ABC방송 회견에서 뻔한 대답으로 일관해 사회자가 “한국 언론이 왜 당신을 미끄러운 장어라 하는지 알겠다”고 말하게 하는 등 외국 언론 또한 별명에 관심을 갖게 했다. 어려운 질문에 장어처럼 빠져나가는 자신의 언어에 자부심이 없다면 하기 힘든 행동이다. 그러나 12일 귀국에 즈음한 그의 언어를 놓고는 설왕설래가 많다.
▦ 먼저 나오는 소리가 여반장(如反掌)이다. 반 전 총장은 귀국 기자회견에서 한일 위안부 합의와 관련해 “완벽한 합의는 위안부 할머니들의 한을 풀어주는 수준이 돼야 한다”며 양국 정부의 위안부 합의가 미흡하다는 투로 말했다. 그러나 2015년 12월 위안부 합의 직후에는 “양국관계 발전에 기여하기를 희망한다”고 공식성명을 냈던 그다. 박근혜 대통령과의 전화통화에서는 “올바른 용단”이라며 “역사가 높이 평가할 것”이라고 치켜세웠다. 불과 1년 남짓 만에 손바닥 뒤집듯 180도 태도를 바꾼 것이다.
▦ 표절 논란도 빼놓을 수 없다. 반 전 총장은 “정권교체가 아닌 정치교체가 필요하다”고 기자회견에서 말했다. 역사학자 전우용씨는 2012년 12월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가 “정권교체 수준을 넘는 정치교체와 시대교체로 새로운 시대, 국민행복시대를 열겠다”고 한 것을 상기하면서 “5년 전 유행했던 말을 다시 꺼내는 걸 ‘시대착오’라 한다”며 “좋아하기에 표절하는 것”이라고 꼬집었다. 주승용 국민의당 원내대표 또한 “정치교체는 안철수 전 대표가 가장 먼저 썼던 말”이라고 주장했다.
▦ ‘똑똑한 바보’ ‘둥근 사각형’처럼 상반된 어휘를 결합하는 수사법을 형용모순이라고 한다. 사고와 형식의 틀을 뛰어넘는 문학에서는 이따금 사용하는 기법이지만 정치처럼 입장을 분명히 밝혀야 하는 분야에서는 쓰지 말아야 한다. 반 전 총장은 기내 인터뷰에서 진보주의자인지 보수주의자인지를 묻는 질문에 진보적 보수주의자라고 했다. 보수면 보수고 진보면 진보여야 할 터인데 둘 다라는 식으로 넘어가면서 노선과 이념을 분명하게 제시하지 않았다. 이를 두고 전우용씨는 “기회주의자”라고 했고, 조국 서울대 교수는 “잡탕”이라고 지적했다.
박광희 논설위원 khpar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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