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현대(삼호중공업)가 살아나야 하는데 지금 지역 상권이 다 죽었다.”
전남 목포역에서 영암군청으로 이동하는 택시 안에서 운전기사가 내뱉은 탄식이다. 조선업 불황 탓에 목포, 영암 경제를 떠받치는 영암의 조선소 현대삼호중공업은 예전 같은 활기가 없다. 현대삼호중공업이 생존을 위해 내린 결정 중 하나는 30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프로 씨름단 해체였다.
1983년 현대중공업이 창단한 현대코끼리 씨름단은 2005년 현대삼호중공업이 넘겨 받아 영암에 둥지를 틀었다. 이만기, 김용대, 이태현, 황규연 등 최고의 스타 선수들이 몸 담았던 현대코끼리 씨름단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듯 했지만 구원 투수가 나타났다. 영암군청이 지난해 9월13일 인수인계에 합의했고, 마침내 올해 1월13일 새로운 돛을 올렸다.
이날 영암군청 왕인실에서 열린 공식 창단식에 참석한 선수들은 만감이 교차했다. 팀의 주장을 맡은 백두급 윤정수(32)는 “팀 명칭만 바뀌었을 뿐인데 막상 이 자리에 오니까 새로운 느낌이 든다”며 “해체 소식이 들렸을 때 흔들리기도 했지만 우리 모두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끝까지 갖고 있었다”고 말했다.
팀 해체 소식 후 수원시청의 러브콜을 받았던 금강급 최정만(27)은 “고향이 수원이라서 고민도 됐지만 4년간 동고동락했던 동료들이 눈에 밟혔다”면서 “현대코끼리 씨름단은 나에게 또 하나의 가족이다”고 털어놨다.
아끼는 후배들과 생이별을 할 처지가 되자 발 벗고 나선 건 ‘맏형’ 김기태(37)였다. 2004년 LG투자증권, 2016년 현대코끼리까지 두 차례 팀 해체의 아픔을 겪은 김기태는 직접 발벗고 인수할 곳을 찾아 다닌 끝에 영암군청과 계약을 성사시켰다.
그리고 초대 사령탑으로 선임된 김기태 감독은 “어느덧 영암에 온지 11년째”라며 “팀을 해단시킨 건 서운하게 생각 안 한다. 다 이해하고 (현대삼호중공업이) 영암군에 시집을 보냈다고 생각하겠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윤문균 현대삼호중공업 대표이사는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윤 대표이사는 “우리 회사가 기반을 잡고 있는 곳은 영암이라 김 감독 말처럼 옆집에 시집을 보낸 느낌”이라며 “사원아파트를 숙소로 무상 제공하는 이유도 가족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설명했다.
영암군 씨름단은 천하장사와 각급 장사 등 화려한 경력의 선수 13명과 황교훈 트레이너로 구성됐다. 올해 씨름단 운영 예산은 국비 3억원, 도비 3억원, 군비 9억1,900만원 등 총 15억1,900만원이다.
모두 지방자치단체 소속인 18개 씨름단 가운데 첫 번째 민속씨름단으로 설ㆍ단오ㆍ추석ㆍ지역장사ㆍ천하장사 등 장사 대회에만 출전한다. 통합씨름협회는 영암군 씨름단을 시작으로 민속씨름단을 늘려 최상위 수준의 대회를 육성하고 씨름 인기 부활도 시도할 예정이다.
영암군 씨름단의 창단을 축하하기 위해 모래판을 호령했던 이만기, 이준희, 이봉걸, 장지영, 이승삼, 이기수 등 왕년의 장사들도 총 출동했다. 또 군민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500명 가량이 행사장을 가득 메웠다.
현대코끼리씨름단의 전성기를 장식한 이만기 인제대 교수는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애착을 갖고 씨름계에 한 획을 그었던 마지막 보루 현대코끼리 프로 씨름단이 없어져 아쉬움이 남지만 영암군 씨름단으로 지역과 함께 상생했으면 좋겠다”며 “옛날부터 우리 씨름은 농민들 곁에 있었기 때문에 영암군민들 안으로 들어가는 씨름단이 되기를 바란다”고 덕담을 건넸다.
전동평 영암군수는 “10년 넘게 현대코끼리 씨름단이 군민들과 애환을 함께 했기 때문에 해체 위기에 놓였을 때 영암군청이 나섰다”며 “우리 고유의 민속경기인 씨름을 보존하고 육성함은 물론 영암군의 브랜드 가치를 높여 지역 특산물 홍보에도 앞장서겠다. 또 선수들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영암군 씨름단은 오는 24일부터 29일까지 충남 예산에서 열리는 설날 장사 씨름대회에 팀 창단 후 첫 장사 타이틀에 도전한다. 김 감독은 “새벽부터 야간까지 이어지는 훈련으로 철저히 준비하고 있다”며 “우리가 금강, 한라, 백두에 강세를 보이는 만큼 한 두 체급 석권을 목표로 하겠다”고 다짐했다.
영암=김지섭기자 oni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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