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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글 쓰는 마음, 글 읽는 마음

입력
2017.01.13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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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안 읽는 시대라지만, 자기 책을 내고 싶어하는 이들은 점점 많아진다. 우리처럼 작은 출판사에도 하루 한 건 꼴로 원고가 들어오니 큰 곳은 오죽할까. 출판 편집자로 첫 발을 내디뎠을 무렵, 쌓여 있는 투고를 눈앞에 두고 받은 충격과 압박감이 지금도 생생하다. 지금이야 이메일로 전송하면 되지만 1990년대 중반만 해도 2백자 원고지에 써내려 간 육필 원고를 직접 들고 출판사를 방문하거나 프린터 출력본을 우송하는 식으로 투고가 이루어졌다.

그때 내가 다니던 회사에서는 베스트셀러 소설이 연달아 나왔다. 잘 팔리는 책이 있을 경우 투고 양도 늘어난다. 내 책상 옆 두 개 박스는 원고로 늘 가득하고, 별다른 선약이 없을 경우 업무시간 이후 그 글을 검토하는 게 습관으로 굳어가고 있었다.

이른 봄날 오전, 편집부 사무실로 한 노인이 찾아왔다. 남루한 옷차림에 주름 자글자글한 얼굴로 광목으로 싼 원고를 두 손으로 받쳐 들고 있었다. 불쑥 나타난 노인을 휴게실로 안내했다. 오랫동안 써온 당신의 자서전 원고를 투고하러 왔다고 했다. 더듬더듬 삶의 이력을 되짚는 그이의 이마에 땀방울이 맺혔다. 검토 후 연락 드리겠다고 했지만, 노인에게는 연락처로 남길 전화번호가 없었다. 대신 날짜를 정해주면 그때 다시 방문하겠노라 하셨다.

광목 보자기 안의 글은 한눈에 봐도 2백자 원고지 3,000매는 넘는 분량이었다. 달필은 아니되 단정한 글씨였다. 때로 검정 볼펜으로, 때로 연필로, 간혹 만년필로 써내려 간 글에는 그이의 한평생이 연대순으로 담겨 있었다. 일제 강점기의 궁핍한 성장사, 전쟁통에 가족 잃고 홀로 버텨낸 청년기와 불행했던 한 번의 결혼생활, 노동판을 떠돌며 이어온 신산한 후반생. 쉽지 않은 세월을 살아내면서도 사그라지지 않은 감성이 문장 곳곳에서 묻어났다. 하기야 그 명민함을 지지대 삼아 홀로 글을 배우고, 틈틈이 원고를 써 내려갔겠지. 그럼에도 한 권의 상품으로 완성되기에는 여러 모로 부족한 원고였다.

약속한 2주째 되던 날 오전, 노인이 다시 방문했다. 광목에 싼 원고를 돌려드리며 검토소견을 에둘러 전했다. 적잖이 실망할 거라 예견했지만,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마주하기가 힘들었다. 나는 쭈뼛쭈뼛 그분을 회사 아래층에 있는 손두부집으로 모시고 갔다. 맛있는 순두부를 노인은 거의 먹지 못했다. 식당에서 일어나기 직전, 그분이 읊조리듯 말했다. “고달팠던 인생이에요. 책으로라도 내 얘기를 남기면 의미가 있을 거라고 다독이며 살았는데, 이제 무슨 낙으로 견딜까요?” 주저앉아 울고 싶을 만큼 마음이 아렸지만 풋내기 편집자인 나는 어떤 도움도 주지 못했다.

그 후 가능하면 투고자와 대면하지 않았다. 채택될 가능성이 희박한 마당에, 글쓴이의 내면이 응축된 원고를 두고 내 주관적 의견을 말하는 게 영 불편하고 불안했기 때문이다. 더러 유쾌한 웃음거리를 남긴 투고자가 없지는 않았다. 회사 앞 카페로 찾아왔던 어느 고위관료는 기본기 제로에다 로맨스 축에도 못 낄 민망한 연애사를 소설이라며 건넸다. 다른 누군가에게 들키기 전에 당장 컴퓨터 파일부터 삭제하라는 조언에 그는 주변에 발설하지 말아달라며 값비싼 저녁을 뇌물로 먹였다. 한껏 고양된 얼굴로 건넨 어느 대학병원 의사의 연작시 역시 우스꽝스럽기로는 발군이었다. 얼굴 두꺼운 그는 자기 시를 못 알아본 나야말로 3류 편집자라고 지금도 큰소리치지만, 노인의 눈빛은 오랫동안 잊히지 않은 채 나를 딜레마에 빠뜨린다.

한데 사흘 전 날아든 투고 메일을 열었다가 전화를 걸어 쌈박질을 할 뻔했다. 도매상 부도로 마음이 모래밭인데, 밑도 끝도 없는 자기계발 원고를 이해득실 따지지 말고 반드시 책으로 내라고 강변하는 글을 보는 순간 참았던 부아가 엉뚱하게 폭발한 거다. 가까스로 화를 누그러뜨렸지만 뒷맛이 영 개운치 않다. 어째 올해도 쉽게 가긴 글렀나 보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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