떳떳한 키덜트의 시대다. 과거엔 구박받기 십상이던 아이 같은 취미들이 당당히 하나의 문화로 인정받고 있다. 드론이나 나노블록이 최근 떠오르는 취미라면, 피규어(모형)는 오랜 기간 사랑 받아온 취미다. 그만큼 종류가 다양하고 넓은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있다. 누군가의 ‘덕후’ 기질을 일깨워줄, 또는 누군가의 어린 시절을 소환할, 개성 있는 서울의 피규어 전시관 네 곳을 소개한다.
◆입이 쩌~억, 최대 규모의 ‘박물관’, 피규어뮤지엄W
피규어는 단지 장난감일 뿐이라는 편견은 버리자. 청담동의 피규어뮤지엄W는 지하 2층, 지상 6층 규모의 박물관이다. 다시 말해 이곳의 피규어는 예술 작품이다. 5층과 6층의 최고급 피규어를 시작으로 4층 일본 애니메이션, 3층 미국의 히어로, 2층 기념품점 순으로 내려오며 관람하길 추천한다.
일단 고급스럽다. 뮤지엄을 표방한 공간인 만큼 수준 높은 인테리어에 노력을 쏟았다. 입구에 서면 독특한 디자인의 문이 열리는데 마치 로봇 안에 들어서는 느낌을 준다. 5층에는 건물의 구조를 살려 비탈진 벽면에 피규어를 전시하고 있다. 마치 벽에서 보물상자를 꺼내 열어놓은 모양새다. 맨 꼭대기인 6층에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피규어들을 전시한 만큼, 층을 올라갈수록 면적이 좁아진다. 6층엔 좁은 공간에 소수의 중요 피규어만 놓여있다. 전시물을 감싼 외벽은 7만개의 LED 모듈로 덮여있어 미디어 파사드를 이룬다.
내용물도 입이 쩍 벌어진다. 실제 영화촬영에 이용됐던 배트맨의 자동차 ‘배트모바일’, 한국 디자이너 ‘PIA’가 제작한 전 세계 하나뿐인 건담, 배우 조민기 소유의 아톰, 아놀드 슈왈제네거가 영화 촬영 시 실제 착용한 재킷 등을 갖추고 있다. 5층에 전시된 자동차 피규어는 부가티 베이론을 비롯해 초고가 모델을 그대로 옮겨 담은 다이캐스트 모델로 자동차 마니아들의 눈길을 오랫동안 사로잡을 만 하다. 곳곳에 배치된 직원들은 미술관의 도슨트처럼 작품에 담긴 스토리를 자세히 설명해 준다.
그렇다고 들어서기 어려운 공간은 아니다. 한번 입장하고 나면 하루 동안 수시로 들어올 수 있기 때문에 아이들이 오랜 시간 동안 쉼터에서 만화책과 애니메이션을 본다. 야외활동이 어려운 날씨에는 피규어 마니아가 아닌 이들도 데이트 장소로 많이 찾고 있다. 입장료는 성인 1만 5,000원, 청소년 1만 3,500원이다.
◆남자도 여자도, 부모님도 아이도 모두 만족, 토이키노
캡틴아메리카도, 건담도 좋아하지 않는 이들이 피규어를 즐길 수 있을까? 정동 경향아트힐 2층에 위치한 토이키노 뮤지엄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피규어 전시관이다. 깊은 관심과 전문적인 지식이 없더라도 가벼운 마음으로 한 바퀴 돌면서 재미를 찾을 수 있다. 고가의 희귀 아이템보다는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한 종류를 전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블 캐릭터를 비롯한 각종 히어로, 디즈니 & 픽사 중심의 애니메이션, 브루스 리(이소룡)를 비롯한 영화 배우, 캐리비안의 해적과 반지의 제왕, 해리포터 시리즈의 판타지 영화 캐릭터,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다섯 곳의 전시관에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중간중간 MLB선수 같은 유명 스포츠 스타들의 모습도 보인다.
히어로 전시관에 함께 놓인 스타워즈 피규어는 중장년층 관객의 향수를 자극한다. 영화화됐던 스타워즈 시리즈의 등장인물들이 세대별로 전시돼 있다. 주인공부터 엑스트라까지 그 규모가 방대하다. 최근 또 다른 시리즈가 극장 상영 중이기에 새롭게 팬이 되고자 한다면 한번쯤 방문할 만하다.
귀여운 캐릭터를 사랑하는 여성이나 아이들은 디즈니 & 픽사 전시관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미키마우스, 도널드 덕을 비롯해 토이스토리, 몬스터주식회사 등 유명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담겨 있다. 특히 대형 설리 모형은 파란 털까지 생생하게 묘사해 슬쩍 만져보지 않고는 지나치기 어려울 것이다.
은하철도 999나 마징가Z, 철인 28호 같은 일본 만화를 동경하며 자란 세대에게는 일본 애니메이션 전시관이 특히 매력적일 것이고, 브루스 리를 비롯한 액션 영화배우에 관심이 많은 관객은 배우 전시관에 끌릴 것이다. 학창시절 해리포터와 반지의 제왕 시리즈를 보며 자랐던 청년층은 판타지 영화 피규어에서 눈길을 떼지 못할 수 있다. 다섯 살 남짓 돼 보이던 한 아이는 화장실에 가던 길에 번외로 마블 히어로들이 전시된 박스 앞에서 한참을 서서 구경하다 엄마 손에 겨우 이끌려 갔다.
관리자에 따르면 평일에는 50여명, 주말에는 100명 정도의 관람객이 방문하며, 아이를 데리고 오는 부모들도 적지 않지만 성인 관람객이 더 많다고 한다. 직장인의 경우 점심시간 할인 혜택을 누리며 산책하듯 한 바퀴 돌아보는 이들이 많고, 대학생들은 남녀를 가리지 않고 많이 찾는다. 대인 1만 2,000원, 소인 1만원, 가족관람 할인이나 각종 소셜커머스 할인 혜택을 활용하면 좋다.
◆쇼핑하다 지칠 땐 ‘캡틴에이드’와 함께, 익스몬스터
잠실 롯데월드몰 2층에 위치한 익스몬스터(Ex-Monster)는 쇼핑에 이끌려 나온 10대 후반에서 40대의 남성 고객을 주요 타겟으로 설정해 만들었다고 한다. 장시간 쇼핑에 지친 이들이 음료 한잔과 함께 피규어를 구경하며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이라는 것이 장점이다.
한 구석에는 19세 이상만 입장 가능한 전시관이 있다. 디테일이 살아있는 아바타의 피규어를 비롯해 다소 징그러울 수 있는 종류가 들어있다. 수위가 높지 않아 아이들도 부모님과 함께 둘러본다. 특히 한강으로 뛰어내리는 괴물을 표현한 피규어는 이곳에서만 볼 수 있다. 전쟁에서 승리해 목을 들고 있는 작은 피규어나 탄알 자국이 세밀하게 표현된 터미네이터 피규어 등은 익스몬스터가 어린이보다는 10대 후반 이상의 어른을 위한 전시관으로 만들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하지만 롯데월드몰 내부에 있다는 장점 때문에 전 연령층의 쉼터가 됐다. 관리자 이종철(37) 실장에 따르면, 평일 낮에는 아이와 함께 온 엄마가 많고 이른 저녁부터는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가 된다. 주말에는 가족단위 관람객도 많은데 테이블은 물론 전시관까지 발 디딜 틈이 없을 때도 있다. ET를 신기하게 보는 엄마와 ‘ET가 뭔지 모른다’며 터미네이터 쪽으로 손을 끌던 꼬마의 모습은 이곳이 모두의 쉼터임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휴식 공간답게 널찍한 테이블과 카페가 함께 있다. 카페에서는 기본 음료 외에 전시관 분위기와 어울리는 에이드와 마카롱을 판매한다. 캡틴아메리카를 본뜬 ‘캡틴에이드’는 기본적인 새콤한 맛에 달콤한 맛을 첨가했다. 시원하고 강한 맛이 느껴져 여름에 마시기 좋은 음료다. 마카롱은 데코레이션이 특이할 뿐 달콤함은 차이가 없었다. 피규어샵과 함께 있어 레고나 피규어를 구입해 테이블에서 조립하는 이들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고, 진정 휴식을 위해 구비된 두 개의 안마의자는 아이언맨과 캡틴아메리카 모양으로 꾸며져 눈길을 끌었다.
◆동화처럼 꾸민 아늑한 아지트, 컨토이너
앞의 세 곳이 전시관의 형태라면, 상수역 컨토이너는 아지트다. 홍대 일대의 여느 카페들처럼 열명 남짓 들어서면 가득 찰 것 같은 작은 규모다. 고가의 피규어도, 크기가 압도적인 피규어도 잘 보이지 않지만 개수는 결코 적지 않다. 아기자기한 피규어와 소품을 구석구석 깔아뒀다.
디테일이 살아있는 건담이나 대형의 히어로들은 찾아볼 수 없다. 일본 애니메이션 ‘원 피스’의 주인공들이나 포켓몬스터, 토이스토리, 몬스터주식회사 등의 작고 귀여운 캐릭터들이 주를 이룬다. 특히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고 있는 애니메이션 크리스마스의 악몽 시리즈 피규어는 다른 곳에서 쉽게 보기 어려운 종류다.
공동운영자 이상욱(31)씨는 오랜 기간 피규어를 수집한 콜렉터다. 혼자만 즐길 것이 아니라 소장제품들을 판매해보고자 하는 마음이 생겼고, 단지 판매만 하기보다는 장난감이 가득한 가게를 만들자는 목표로 문을 열었다. 대부분의 피규어를 판매하고 있으며, 그때그때 특가로 내놓는 상품은 구매욕을 자극한다.
피규어와 빈티지 소품을 활용한 내부 인테리어는 이색카페를 선호하는 요즘 흐름에 잘 맞는다. 지저분한 다락방 같으면서도 귀여운 소품들이 많아 아늑한 매력이 있다. 게다가 카페 위층 옥상은 분홍색과 민트색 등 파스텔톤의 페인트로 꾸며 사진 찍기 좋아하는 이들에겐 이미 유명하다. 경남 김해에서 온 김채린(19)씨는 피규어에 크게 관심은 없지만 사회관계망서비스(이하 SNS)에서 예쁜 옥상의 분위기를 보고 멀리서 찾았다. 날이 좋지 않아 온라인에서 보던 옥상의 화사한 느낌은 덜했으나, 예쁜 사진을 건지기 좋은 공간으로 추천할 만하다고 말했다.
홍대 정문에서 상수역으로 나가는 골목에 위치해 찾기가 쉽지 않은데도 SNS로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날이 따뜻할 때는 카페 입구로 올라오는 계단을 넘어 밖까지 줄이 이어지기도 한단다. 온라인 홍보가 잘 된 덕분인지 생각보다 외국인들이 많이 찾고, 최근 들어서는 젊은 어머니들이 아이를 데리고 찾아오는 경우도 늘었다. 그러나 주 방문객은 역시 사진을 찍어 공유하기 좋아하는 10대, 20대 여성들이다.
민준호 인턴기자(서울대 사회학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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