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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소비, 어디까지 해봤니?

입력
2017.01.11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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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카가 주는 ‘있어빌리티’의 만족감과 보행자 보호의 철학은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전자가 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사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게 가치소비, 착한 소비다. 게티이미지뱅크
럭셔리 카가 주는 ‘있어빌리티’의 만족감과 보행자 보호의 철학은 모두 중요하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아직도 전자가 더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게 사실. 누구도 반대하지 않지만 실천하기는 쉽지 않은 게 가치소비, 착한 소비다. 게티이미지뱅크

자동차 ‘덕후’인 40대 직장인 A씨는 스웨덴 자동차 볼보의 보행자 안전 철학에 깊은 감동을 받고 ‘새 차를 사면 반드시 저걸 사리라’ 생각해왔다. 2020년까지 교통사고 사망자와 부상자를 제로로 만들겠다는 야심 찬 프로젝트를 가동 중인 볼보는 2010년 보행자가 있으면 자동으로 감지해 차를 멈추는 오토 브레이크 기능을 도입했다. 2012년에는 세계 최초로 보행자 안전을 위해 차량 외부에 에어백을 장착하기까지 했다. 볼보를 타고서는 막아선 악당들을 밀어버리며 도주하는 액션영화를 더 이상 찍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운전자와 탑승자의 안전만 생각하는 여타 브랜드들과는 차원이 달라. 역시 북유럽 클라쓰”라며 찬탄하던 A씨는 그러나 정작 새 차를 구입할 때가 되자 변심했다. 북유럽의 인본주의 철학을 언제 그랬냐는 듯 저버리고 유명 독일 차의 세련되고 부티 나는 ‘있어빌리티’를 선택한 것. “볼보의 디자인과 퍼포먼스도 정말 매혹적이었는데 독일 차의 그 어필링한 디자인과 날렵한 선들을 끝내 포기 못하겠더라고요.” 인류의 발전을 위해 기꺼이 내 돈을 지불하는 착한 소비, 가치소비는 누구나 머리로는 찬동한다. 하지만 막상 몸으로는 실천하기가 어렵다.

완판여신 전지현이 등장한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 중 한 장면. 입고 있는 미우미우 코트가 '전지현 코트'로 화제를 모았다. SBS 화면 캡처
완판여신 전지현이 등장한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 중 한 장면. 입고 있는 미우미우 코트가 '전지현 코트'로 화제를 모았다. SBS 화면 캡처

착한 소비? PPL이 더 좋아

어떻게 하면 제품을 더 많이 팔 수 있을까 하는 모든 기업의 고민이 한국에서는 거의 단 하나의 솔루션으로 해결된다. ‘전지현에게 입히고 바르고 먹여라!’ 현재 방영 중인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을 통해 ‘전지현 패딩’과 ‘전지현 코트’를 품절시키며 완판 신화를 이어가고 있는 전지현은 앞서 립스틱과 가방 주얼리 등은 물론 치킨까지 히트시키며 ‘완판여신’으로 자리잡았다. 전지현의 이름 자리에 다른 스타 누구를 넣어도 마찬가지다. 드라마나 영화 속 간접광고(PPL)가 최고의 마케팅 수단인 한국 시장풍토에서 착한 소비는 제 힘을 발휘하기 힘들다. 전지현 코트를 입는다고 전지현처럼 늘씬해지고 전지현 립스틱을 바른다고 전지현처럼 예뻐지는 것도 아닌데.

전지현 틴트로 불렸던 생로랑의 핑크색 틴트를 사본 경험이 있다는 20대 직장인 B씨는 “솔직히 ‘유사 전지현 효과’ 정도는 노리죠”라고 답했다. 다시 그에게 물었다. ‘아프리카 여성들의 아름다워질 권리를 위해 립스틱 하나를 사면 하나는 아프리카에 기부하는 1+1 브랜드가 있다. 전지현 립스틱과 가격 및 성능이 동일하다. 어떤 것을 사겠는가?’ 약간의 망설임 끝에 돌아온 답은 전지현 립스틱. “착한 소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떠오르지 않는 것 같아요. 접하기도 쉽지 않고요. 반면 전지현 립스틱은 정보 취득이 쉽고 접근 가능성도 좋잖아요. 막상 써보면 성능도 어느 정도 괜찮고요.” 취업준비 중인 20대 여성 C씨도 “가치소비를 추구하기에는 흔히 가는 마트나 백화점에 선택 옵션 자체가 많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인터넷을 뒤져 공정무역 커피를 파는 카페를 찾고 친환경 섬유로 만든 옷을 사 입기엔 사는 게 너무 바쁘고 힘들어요.”

2015년 배출가스 조작 파문으로 세계적 디젤스캔들을 일으킨 폴크스바겐은 한때 한국에서만 폭탄세일로 매출이 증가하는 이변을 기록해 부끄럽다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개이득’과 ‘득템’이란 말에서 보듯 한국은 비싸고 유명한 제품을 싼 값에 싸는 게 최고의 소비로 여겨지는 곳이다.

착한 소비가 소비자의 의지만으로 가능하지는 않다. 좋은 제품과 접근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선한 의지가 있더라도 실천하기 어렵다. 게티이미지뱅크
착한 소비가 소비자의 의지만으로 가능하지는 않다. 좋은 제품과 접근성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리 선한 의지가 있더라도 실천하기 어렵다. 게티이미지뱅크

“인색하군” Vs “정말 착한 거야?”

한국이 착한 소비에 인색한 국가라는 지표는 꽤 많다. 지난해 5월 마스터카드가 아시아태평양 지역 14개국을 대상으로 실시한 ‘착한 소비 지수 국가별 비교’에 따르면 한국은 37.4점으로 11위였다. 1위는 인도네시아로 73.2점이었으며, 뒤를 이어 태국(69.6) 중국(68) 인도(66.2) 순이었다. 일본은 39.5점으로 9위였다. 착한 소비 지수는 친환경제품과 공정무역 제품, 기부금 자동 적립 제품의 구매비율을 합쳐 산출한 점수로 최근 3년 안에 해당 제품을 구매해 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합산한 점수다. 공정무역 제품을 사본 적이 있다는 한국인들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어 2013년 52.4%에서 2014년 43.6%, 2015년 40.6%로 감소일로였다.

사회공헌에 활발한 기업으로 착한 소비의 범주를 넓혀도 마찬가지다. 정보분석업체 닐슨이 2015년 10월 발표한 ‘기업 사회공헌활동에 관한 글로벌 소비자 보고서’에서도 한국은 글로벌 평균보다 윤리적 소비에 인색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회 공헌을 많이 하는 기업 제품에 더 많은 돈을 지불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 전 세계 60개국 3만명 중 66%가 그렇다고 답한 반면 한국은 58%만이 ‘예스’라고 답했다. 베트남(86%) 인도(85%) 필리핀(83%)등 아태지역 개발도상국가들이 착한 소비에 우호적이었다. 공정무역의 당사국들이라 보다 절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너무 많은 물건들로 선택피로에 시달리는 북미와 유럽은 44%와 51%로 착한 소비에 대한 관심이 낮았다.

착한 소비가 쉽게 이뤄질 수 있으려면 착한 제품이 많아져야 하고, 착한 제품의 접근성이 좋아져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착한 소비가 쉽게 이뤄질 수 있으려면 착한 제품이 많아져야 하고, 착한 제품의 접근성이 좋아져야 한다. 게티이미지뱅크

모든 소비가 공동체에의 헌신만을 위해 이뤄질 수는 없다. 소비의 의사결정에는 다양한 욕구와 요인들이 작용한다. 나쁜 제품을 착하다는 이유만으로 구매할 수는 없는 노릇. 직장인 이수영(29)씨는 “아프리카 아이들에게 기부된다고 해서 온라인 쇼핑몰에서 시어버터를 한 덩어리 샀다가 일회용 위생팩에 담겨 온 걸 보고 깜짝 놀랐다”며 “아무리 착한 제품이라지만 너무 성의 없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제품의 품질보다 선의가 우선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돕는 브랜드의 핸드폰 케이스와 맨투맨 티셔츠를 산 적이 있어요. 그런데 4만원 넘는 티셔츠가 질이 너무 안 좋더라고요. 수익금을 전액 할머니들을 돕는 사업에 사용하고 있다고 광고하더니 나중에 보니 수익금도 아니고 매출의 5%를 기부하는 거였어요. 속았다는 배신감만 들더라고요.”

소비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친연성과 연관성도 중요하다. 푸들을 키우는 취업준비생 김예나(27)씨는 강아지 수제 간식을 하나 사면 다른 하나를 유기견에게 기부하는 바이트미(biteme)라는 업체를 자주 이용한다. “공정무역 커피나 초콜릿은 비싸기도 하고 어떤 경로로 수익금이 분배되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아프리카와 저 사이에 거리가 너무 멀어 선뜻 손이 가지도 않고요. 하지만 개를 키우니까 유기견 돕는 제품에는 호응하게 되고, 간식후원현황도 인증해 보여주니까 제가 도움을 줬다는 보람도 커요.”

착한 소비는 기업을 변화시킨다. 사회공헌에 활발한 기업을 애정해 주는 것은 소비자 주권의 행사로 중요하다. 게티이미지뱅크
착한 소비는 기업을 변화시킨다. 사회공헌에 활발한 기업을 애정해 주는 것은 소비자 주권의 행사로 중요하다. 게티이미지뱅크

밀레니얼 세대 “착한 소비 걱정 마”

세계 어떤 조사에서건 가치소비에 가장 적극적인 것은 밀레니얼 세대(만 21~34세)다. 닐슨의 2014년 조사에서 착한 소비에 돈을 더 쓰겠다는 응답자의 절반이 밀레니얼이었으며, 2015년 조사에서 이 비율은 네 명 중 세 명으로까지 치솟는다. 더 어린 Z세대(만 15~20세)도 2014년 55%에서 2015년 72%로 착한 소비에 적극적이었다. 반면 베이비부머 세대는 51%(2015년)에 그쳤다.

다양한 조사에서 착한 소비 의사는 매년 높아지고 있지만, 이것이 실제 구매로까지 이어지는지는 확인하기 어렵다. ‘착한 소비를 하시겠습니까?’라는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하는 것이 오히려 독특하고 솔직한 태도다. 그래서 닐슨 보고서는 사회공헌도가 높은 글로벌 브랜드 20개를 선정해 매출 증가 추이를 살펴봤는데, 제품 포장지에 지속가능성에 대한 기여를 표기한 브랜드는 2014년 현재 연간 매출이 2% 증가했다. 마케팅 프로그램을 통해 지속가능성 운동을 적극 홍보한 브랜드들은 5%의 매출 신장이 있었다. 반면 둘 다 하지 않은 브랜드 14개는 매출이 1% 증가하는 데 그쳤다. 착한 기업이 더 많이 성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서울 삼청동의 환경에 어울리게 한옥 스타일로 지은 뷰티 브랜드 이솝의 시그니처 매장. 이솝 제공
서울 삼청동의 환경에 어울리게 한옥 스타일로 지은 뷰티 브랜드 이솝의 시그니처 매장. 이솝 제공

호주 뷰티 브랜드 이솝(Aesop)은 ‘화이트닝’이나 ‘7일의 기적’ ‘놀라운 변화’ 같은 홍보 문구를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 화장품 하나로 바른다고 해서 그런 기적적 변화가 일어날 리도 없거니와 화이트닝 같은 표현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표현이 아니기 때문이다. TV 등 매체 광고도 하지 않으며, 브랜드 홍보물에 모델을 쓰지도 않아 ‘안티-뷰티’ 뷰티 브랜드라는 평가도 받는다. 아름다움은 균형 잡힌 식사와 숙면, 적절한 운동과 지적 활동을 통해 총체적으로 구현되는 것이라는 철학 아래 휴가철 사은품으로 소설 ‘위대한 개츠비’를 나눠주는 마케팅을 진행한 적도 있다.

지역사회에 자연스럽게 녹아 들고 기여해야 한다는 철학 아래 전 세계 200여개 매장이 건축 스타일과 인테리어가 모두 다르며, 환경 보호를 위해 별도의 포장박스 없이 재생 가능한 갈색병에 깨알 같은 글씨로 사용법 스티커를 붙여놓는다. 제품을 담아주는 페이퍼백에는 매장 주변의 문화 명소 정보 등을 표기해 제품보다는 지역사회를 홍보하는 데 주력한다. 전지현 립스틱 같은 히트아이템은 나올 수가 없는 구조다. 과연 장사가 될까?

이솝 관계자는 “2013년 한국 법인이 문을 연 이래 백화점 매장 10개, 시그니처 스토어 7개, 면세점 4개 매장을 운영 중인데, 전년 대비 매출이 2배 정도 성장했다”고 말했다. “이솝의 브랜드 철학을 깊게 받아들이는 가치소비의 흐름이 한국 소비자들에게도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는 설명이다.

친환경과 지속가능성 이슈는 의류 브랜드에서 특히 첨예하다. 아웃도어브랜드 파타고니아는 환경 보호를 위해 공정무역과 친환경 소재를 사용할 뿐 아니라 불필요한 소비를 막기 위해 ‘오래 입은 옷’ 고쳐 입기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어떻게라도 하나 더 사게 만들어야 하는 기업 본분을 망각하고 ‘자꾸 사지 말고 고쳐 입으라니까’를 외치며 다른 브랜드 옷까지 포함해 최대 2벌을 수선해준다. 사료를 강제로 먹이거나 살아있는 상태에서 털을 뽑은 거위나 오리는 사용하지 않고, 매년 매출의 1% 또는 수익의 10% 중 더 많은 금액을 비영리 환경단체에 기부한다.

래;코드가 재고 의류를 해체해 독립디자이너들과 협업해 만든 업사이클링 의류. 코오롱 제공
래;코드가 재고 의류를 해체해 독립디자이너들과 협업해 만든 업사이클링 의류. 코오롱 제공

코오롱이 운영하는 래;코드 역시 환경보호를 위해 버려지는 의류 재고를 해체해 객공시스템으로 리디자인해 만드는 친환경 업사이클링 브랜드다. 객공시스템이란 공장식이 아닌 장인 한 사람이 처음부터 끝까지 책임져 만드는 제작시스템으로, 독립 디자이너들과의 컬래버레이션을 통해 진행하고 있다. 의류 해체는 지적 장애인들에게 맡기는데, 해체된 재고 의류라는 소재의 특성상 디자인 제약이 크고, 최대 5개인 한정 수량으로 생산할 수밖에 없다. 날개 돋친 듯 잘 팔리지 않는 이상 ‘그냥 버리는 게 남는 장사’가 되기 쉬운 구조다.

이들 기업의 매출에서 ‘착함’이 기여하는 비율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산출하기 어렵지만, 두 곳 모두 “가치소비의 철학이 점점 더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고 있다”고 답한다. 지금 한 벌 덜 팔고 수선해주면 당장은 손해지만, 소비자들이 느낀 만족과 보람이 훗날 다른 브랜드보다 자사 브랜드에 대한 선택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매우 영리적인 계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체로 위악보다는 위선이 나은 법.

아직은 구매운동보다 불매운동이 더 뜨겁게 소비자 주권을 행사하는 방식으로 각광받고 있지만, 변화의 움직임은 뚜렷하다. 안전의 대명사 볼보는 최근 몇 년 사이 20~50%의 성장세를 보였다. 문제는 속도. 기업을 격려하고 혼내주는 효과적인 방편으로서 한낱 소비자인 내가 행사할 수 있는 이 권력이 정치혁명의 시기를 맞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오늘 나는 뭘 사지?

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변해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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