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서 산업용 밸브를 제작하는 중소 제조업체 A사는 경기 침체로 2년 연속 매출이 10%씩 줄었다. 협력업체들도 상황이 좋지 않아 이들로부터 받아야 할 미수금이 늘면서 기본적인 운영 자금을 조달하는 데도 애를 먹고 있다. A사 대표는 “당장 대출 만기가 코 앞인데 은행들도 만기 연장을 해주지 않아 매우 어려운 상황”이라며 “중소기업청 지원 제도를 알아보고 있지만 심사가 까다로워 쉽지 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전북 전주의 승강기 제조업체 B사는 전체 매출의 60% 정도가 수출 물량이었는데, 해외 수주가 줄면서 지난해 수출 실적이 2015년 대비 40% 이상 감소했다. 지금도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지만, 매출이 급감하면서 신규 채용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B사 대표는 “지금으로선 기존 인력 유지도 벅찬 상황”이라고 말했다.
국내 제조업체들은 올해 1분기 기업 경기가 외환위기 직후인 1998년 수준까지 악화될 것으로 전망했다. 제조업체 2곳 중 1곳은 생존을 위해 현상 유지 등 ‘보수적 경영’에 집중할 계획인 것으로 조사됐다.
대한상공회의소는 전국 2,400여개 제조업체를 대상으로 1분기 경기전망지수(BSI)를 조사한 결과 작년 4분기(86) 보다 18포인트 급락한 68로 집계됐다고 9일 밝혔다. 기업 체감경기를 뜻하는 BSI는 100 이상이면 경기가 좋아질 것으로 전망하는 기업이 많은 것이고, 100 미만이면 그 반대다.
장기 불황 속에서도 80~90포인트를 유지했던 BSI가 68까지 추락한 것은 대내적으로는 ‘정치 갈등에 따른 사회혼란’(40%ㆍ복수응답), ‘자금조달 어려움’(39.2%), ‘기업관련 규제’(31.6%) 때문이었고, 대외 요인으로는 ‘중국 성장 둔화’(42.4%), ‘보호무역주의 확산’(32.3%), ‘미국 금리 인상에 따른 금융 여건 악화’(28.4%) 등이 꼽혔다.
68인 올해 1분기 BSI는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한 이후 6번째로 낮은 수치다. 한국 정부가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한 직후였던 1998년 2분기(65), 3분기(61), 4분기(66)에 60포인트 대에 머물렀고,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1분기에 55까지 추락한 적이 있다. 2009년 2분기에도 66을 기록했었다.
경제 위기에 대한 전문가들의 경고도 커지고 있다. 권태신 한국경제연구원장은 8일(현지시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한미경제학회 조찬 포럼에서 “한국 경제는 소비 투자 수출의 세가지 성장 기둥이 동시에 무너져 내리는 ‘퍼펙트 스톰’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고 주장했다. 권 원장은 “가계 부채가 외환위기 때보다 크게 증가해 적자 가구 비중이 21%를 넘어서고 있는데다 생산가능 인구마저 감소해 당분간 우리 경제가 활력을 찾긴 어렵다”고 전망했다.
기업들이 우려한 ‘정치 갈등에 따른 사회 혼란’도 큰 문제로 지적했다. 닉 블룸 스탠포드대 교수, 스티븐 데이비스 시카고대 교수 등의 조사 분석 자료에 따르면 최순실 게이트로 불거진 한국 경제의 정책 불확실성은 1990년 이후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들은 한국일보 등 6종의 한국 일간지 기사를 분석해 ‘한국의 경제 정책 불확실성 지수’를 집계하고 있다. 최순실 게이트로 인한 경제 정책 불확실성은 94년 북한 김일성 주석 사망, 98년 외환위기, 2003년 이라크 전쟁,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보다도 높은 것으로 분석했다.
권 원장은 이를 근거로 “정치적 요인에 의한 정책 불확실성이 IMF 위기 때의 3배에 달하고, 대선으로 인한 불확실성도 커져 투자가 빠른 회복세를 보이기 어렵다”고 진단했다.
정영록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산업화를 통한 성장은 한계에 달해 성장 보다는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도록 경제 체질을 개선해야 한다”며 “정부는 정책을 주도하기 보다는 기업 활동을 지원하는 역할에 그쳐야 하며, 근본적인 국가적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한준규 기자 manbok@hankookilbo.com
민재용 기자 ins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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