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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혜는 나의 힘'… 연극계 "힘들어도 창작 영감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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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혜는 나의 힘'… 연극계 "힘들어도 창작 영감 넘친다"

입력
2017.01.0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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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천막극장 블랙텐트 앞에서 미술가들이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얼굴상을 만들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9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 천막극장 블랙텐트 앞에서 미술가들이 블랙리스트 작성에 관여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얼굴상을 만들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9일 오전 서울 광화문광장 천막극장 ‘블랙텐트’. 극장장을 자처한 극단 고래의 이해성 연출가가 후배 3,4명을 데리고 조명과 객석을 설치하기 시작했다. “기습적으로 세워서 허술한 데가 많아요. 객석 뒤에 조명 조정석도 만들고, 엉성하게 막은 천막 이음새도 보강해야죠.”

극장은 지난달 7일 이 연출가가 박근혜 정부 퇴진을 요구하며 만든 광화문 예술인 천막 캠핑촌에 입성하면서 세워졌다. 장소익 극단 나무닭움직임연구소 대표가 가설극장 기자재를 빌려주면서 극장 개설은 빠르게 진행됐다. 평소 ‘뾰족한’ 작품을 만들며 사회를 비판해 온 김재엽, 이양구, 임인자 연출가와 역시 ‘뾰족한’ 작품평을 써온 김소연 연극평론가가 ‘블랙텐트 운영위원회’에 합류하며 극장서 공연할 연극 라인업도 갖췄다.

한 없이 모자랄 공연 제작비는 연극계 중견 원로 20여명이 ‘금일봉’을 투척하며 일단 급한 불을 껐다. 7일 극장 설립 이후엔 이 연출가의 계좌로 공개 후원을 받고 있다. 작품을 일단 보고 마음이 움직이며 후원하는 식의 ‘감동후불제’다. 블랙텐트와 이곳에서의 공연은 아이러니하게도 박근혜 정부가 준 선물 아닌 선물이다. 이 연출가 등은 박 정부에서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정부 비판적 연극인 등을 공공기관 지원 등에서 배제했다는 생각에 블랙텐트를 세우고 정부 비판에 나섰다. 생각지도 못했던 곳에서 뜻밖의 예술혼을 발휘하게 된 셈이다.

9일 오후 천막극장 블랙텐트에서 관계자들이 조명시설을 설치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9일 오후 천막극장 블랙텐트에서 관계자들이 조명시설을 설치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풍자극이 되살아나고 후원금 모금과 천막극장 같은 기상천외한 제작 방식이 연극계에 등장하고 있다. 최순실씨의 국정농단이 여러 갈래로 분열됐던 한국사회를 통합시켰듯,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 검열과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이 연극인들에게 의도치 않게 창작의 영감을 가져다 주고 있다.

쓸 소재가 지천에 널려

이 연출가는 “새 작품 써야 할 시기에 ‘동안거’ 하며 이 작업하는 거”라 외치면서도 “박근혜 정부 이후 쓸 소재가 무궁무진해졌다”고 말했다. “(국정농단과 관련해)이 소재 정말 기막히다 하는데, 더 기막힌 소재가 계속 나오잖아요? 당장 큰 작품이 나오진 못해도 창작하는데 자양분이 될 것들이 많죠.”

이 연출가는 16일 블랙텐트의 개막을 알리는 연극 ‘빨간시’의 연출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와 장자연 성상납 사건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2011년 초연 후 현안에 맞춰 꾸준히 개작했고 2015년 한국-일본 정부의 ‘12.28 합의’ 내용을 반영해 다시 한번 다듬었다.

연극 '괴벨스 극장'은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의 일생을 통해 박근혜 정부의 검열을 풍자한다. 이 연극의 오세혁 극작가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문서 파기’ 뉴스를 모티프로 한 새 작품을 집필 중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연극 '괴벨스 극장'은 나치 선전장관 괴벨스의 일생을 통해 박근혜 정부의 검열을 풍자한다. 이 연극의 오세혁 극작가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의 ‘문서 파기’ 뉴스를 모티프로 한 새 작품을 집필 중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오세혁 극작가. 오세혁 페이스북
오세혁 극작가. 오세혁 페이스북

블랙텐트의 두 번째 연극 ‘그와 그녀의 옷장’(23~24일)을 쓴 오세혁 극작가는 지난해부터 역사적 사실에 시국을 빗댄 풍자극을 쓰기 시작했다. 독일 나치 정권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를 통해 정부의 검열 메커니즘을 풍자한 ‘괴벨스 극장’(지난 9월 연우소극장 초연)에 이어 요즘 집필하는 작품은 ‘국민 여러분’(가제). 한국 전쟁 당시 공무원들의 피난 기록을 무대화하려 한다. 피난길에서도 경무대의 명령으로 전국 공공기관을 돌아다니며 목숨 걸고 정부 문서를 파기했던 한 공무원의 실화를 그린다. 오 극작가는 “소재 찾아놓고 ‘타이밍 맞으면’ 바로 써내는 작업을 10년간 반복했는데, 최근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 대한 뉴스를 보고 3년 전 읽었던 한국전쟁 피난 기록을 연극으로 쓸 때가 됐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연극 ‘백석우화’는 시인 백석의 삶을 그리나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예술인과 시대의 불화로 해석하는 관객들이 많다. 연희단거리패 제공
연극 ‘백석우화’는 시인 백석의 삶을 그리나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의혹과 관련해 예술인과 시대의 불화로 해석하는 관객들이 많다. 연희단거리패 제공
김소희 극단 연희단거리패 대표.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소희 극단 연희단거리패 대표. 한국일보 자료사진

관객은 같은 작품도 시국에 맞춰 적극적으로 해석하는 요즘이다. 김소희 극단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지난해 초연한 ‘백석우화’는 시인 백석이 시대와 겪는 불화를 그렸지만, 시국과 맞물리며 사회와 예술인들의 갈등으로 읽는 관객들이 있었다”고 말했다. 극단은 이윤택 예술감독이 2012년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한 뒤 박근혜 정부에서 지원금이 눈에 띄게 줄었다.

박근혜 정부를 거치며 작품 스타일이 확 바뀐 연출가도 있다. 주로 소소한 가족 이야기를 선보였던 이양구 연출가는 박근혜 정부 초기 파업에 따른 손실을 노동자에게 전가하는 손배가압류 문제를 극화한 ‘노란봉투’를 만들며 사회로 눈을 돌렸다. 2년 전 연극계 블랙리스트 의혹이 제기된 후에는 검열을 주제로 한 행사에 발제자로 참여했고, 국내외 검열 역사를 공부하며 작품을 만들었다. 지난해 발표한 연극 ‘씨씨아이쥐케이’로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의혹을 풍자했다. 이양구 연출가는 “풍자극은 동시대성이 강해 작품이 생생하고 관객과 호흡한다는 점이 가장 큰 장점”이라면서도 “적폐가 하도 많이 쌓인 사회라 사안이 터질 때마다 방대한 내용을 공부하며 작품으로 만드는데 시간이 걸린다”고 말했다.

연극 '씨씨아이쥐케이'의 장면. 극단 해인 제공
연극 '씨씨아이쥐케이'의 장면. 극단 해인 제공

텀블벅부터 ‘주말만 극장’까지 제작방식도 기발

재기 넘치는 연극 제작방식도 박근혜 정부가 가져다 준 ‘혜택’이다. 정부의 블랙리스트 작성 의혹을 비판하며 지난해 6~10월 열린 연극제 ‘권리장전 2016 검열각하’의 경우 22편, 110회의 공연에 필요한 비용을 소셜펀딩 사이트 ‘텀블벅’을 통해 충당했다.

극단 연희단거리패는 경비를 줄이는 묘책을 마련했다. 기존에 운영하던 대학로 게릴라극장을 정리하고 명륜동 성균관대 일대에 공연제작 스튜디오와 극장을 합친 ‘30스튜디오’를 세웠다. 금요일에서 일요일까지 주 3일만 공연하고 평일은 단원 워크샵, 회의 장소 등으로 공간을 알뜰히 활용한다. 김소희 대표는 “박근혜 정부 초기 연간 8,400만원씩 지원받던 문화예술위 공간지원사업이 2015년 갑자기 폐지됐다”며 “정부 지원금을 받는 극단이 게릴라 극장을 대관해 공연하는 등 대안을 모색했지만 운영이 힘들어 극장 자리를 옮기고 객석 규모도 축소했다”고 말했다.

예술적 영감이 넘쳐난다고 하나 연극인들도 이런 우울한 시국을 반길 리 없다. 김소희 대표는 “(이런)시국이 계속되면 사람들이 그 분위기에 또 적응하니 경계해야 한다. 풍자도 비판도 오래 보면 지친다”고 말했다.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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