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그러잖아요. 힘든 기억은 잊혀지지 않는다고. 그런데 의도적으로 기억을 지울 수도 있더라고요. 잊지 않으면 일상생활을 할 수가 없었거든요. 초등 고학년부터 고등학교 1학년까지, 저는 집단 따돌림을 당했습니다.
사실 어떻게 당했는지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아요. 너무 힘들어서 잊으려고, 기억을 지우려고 죽을 힘을 다해 노력했거든요. 아마 초등 4학년 수학여행을 다녀온 이후부터였던 것 같아요. 아이들이 은근슬쩍 저를 피하더라고요. 제가 수학여행 중 뭘 잘못한 건지, 아이들은 그때부터 제가 옆에 있는데도 자기들끼리 귓속말을 하더군요. 애국조회 때 두 줄로 서라고 하면 제 옆에는 아무도 서지 않았고, 점심시간에는 같이 밥을 먹을 친구가 없었어요. 그래서 쉬는 시간이면 늘 혼자 앉아 책을 읽곤 했죠.
6학년 때부터 따돌림이 심각해지기 시작했어요. 저를 놀리는 단어를 쓴 포스트잇을 수업시간에 제 등에 몰래 붙여놓기도 했고, 제 교과서에 낙서를 해놓거나 제 물건을 다른 곳에 옮겨두기도 했죠. 제가 앞에 있는데도 대놓고 제 욕을 한 적도 있었고요. 6학년 수학여행 때는 같은 방을 쓰던 아이들이 “너 잠자면 얼굴에 낙서해 놓는다”고 해 밤새 한숨도 못 잔 날도 있습니다.
그래도 초등학교 때는 담임선생님께서 항상 교실에 계셨고, 부모님과 이야기를 나누신 후 주동자 아이들을 불러 야단도 치고 하셨어요. 6학년 때는 의도적으로 친구 두 명을 붙여주기도 하셨고요. 하지만 일시적이었을 뿐 큰 도움은 되지 못했습니다. 조금 지나면 다시 반복되기를 거듭하다 보니 괜히 부모님께 말씀 드려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더라고요. 그냥 하루하루 지나가겠지 하며 혼자 버텼어요. 초등학교 아이들이 모두 같은 중학교로 진학해 괴롭힘이 계속됐지만, 그냥 저 혼자 감당했죠. 끊임없는 언어폭력에도, 혼자 책을 읽고, 혼자 밥을 먹으며, 한 귀로 흘려버리려고만 했습니다.
그때 그 일을 그냥 덮고 지나간 탓일까요? 결혼해 네 살배기 딸을 둔 지금까지도 대인관계가 어렵습니다. 저는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몸이, 마음이 모조리 다 기억하고 있는가 봐요. 머리로는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아직까지도 그때를 떠올리면 이렇게 아프고 두려우니…. 우리 아이만큼은 엄마 같은 상처를 갖지 않고 사회성 좋은 아이로 자랐으면 좋겠기에 용기를 내 또래 엄마들도 만나봤지만 다 일회성으로 그치고 맙니다. 조금 친근감 있게 다가가고 먼저 연락도 해야 더 친해질 텐데 상대방이 먼저 다가오기만 기다리고 있으니 만남이 지속되지 않는 것 같아요. 제가 만났던 엄마가 다른 곳에서 다른 엄마와 친하게 지내면 기분도 묘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옛 상처가 떠올라 많이 힘들어요. 아이가 학령기에 들어가면 다른 엄마들과의 관계도 중요하다고 하는데 너무 겁이 납니다. 혹시 제 대인관계 트라우마가 아이의 사회성에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육아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는 건 아닐까 너무 두렵습니다.
원하던 학과에 들어가 새롭게 대학생활을 잘 하고 있을 때 가해자 아이한테 갑자기 연락이 온 적이 있어요. “그때 미안했다”고 사과하는 걸 듣고 있는데 멍해지면서 눈물만 나더군요. 어차피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지는 못 할 테니까요. 부모님과의 관계는 늘 좋았고, 친구들 문제는 얘길 꺼내지 않는 게 걱정시키지 않는 방법인 줄만 알았기에 아직도 모르고 계십니다. 그렇게 덮고 가는 게 상처가 치유되지 않는 길이라는 걸 그때는 몰랐네요.
제가 엄마가 되고 보니, 그때 왜 학교를 그만 다닐 생각을 못했을까 후회가 돼요. 부모님도, 저도 학교를 떠난다는 건 생각도 못하고, 그 힘든 학창시절을 꾸역꾸역 다 겪었네요. 학교를 다니지 않고 집에서 혼자 공부해 검정고시를 치렀어도 됐는데, 그걸 몰랐어요. 만일 우리 딸아이가 그런 일을 겪는다면, 전 학교는 쉬게 할 겁니다. 그 지역을 벗어나 아예 먼 곳의 다른 학교를 다니게 해줄 생각도 있고요. 하지만 그런 일이 생길까 봐 너무 두렵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학교는 절대 아이를 보호해주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서 아예 홈스쿨링을 시킬까 고민도 많이 하고 있어요. 남편도 제 상처를 잘 알고 있어 함께 의논 중입니다.
아이가 학교에 가서 겪게 될 것들이 너무 두려워요. 저와 학부모들과의 관계도 너무 공포스럽습니다. 그러면서 이게 또 아이한테 나쁜 영향을 주는 것 같아서 괴롭고요. 선생님.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신혜조씨ㆍ가명, 34세, 주부)
“한국 사회에서 집단 따돌림은 하나의 문화가 된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심각한 현상입니다. 어린이집부터 노인정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에 퍼져 있죠. 따돌림의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들이 그래서 너무나 많습니다. 특히 또래관계의 어려움으로 인해 학창시절 겪은 트라우마는 한 개인의 인생에 실로 심각한 영향을 주죠. 희생자가 되어 보지 않는 사람들은 쉽게 말해요. ‘아이들이 한때 장난치고 놀릴 수도 있지. 뭘 그런 걸 가지고 그래.’ 이렇게 문제를 축소하거나 폄하합니다. 하지만 이런 경험이 있거나 심각한 케이스의 희생자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아무리 청소년이지만 집단 따돌림은 범죄로 다뤄야 한다”고까지 말합니다. 생각보다 많지만 실상은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고, 심각한 사건들이 언론에 보도되면 표면화되지만 진지하게 해결책이 도모되지는 않는 게 바로 이 문제죠. 사실은 우리 모두가 각성을 해야 하는 문제입니다.
집단 따돌림이 무서운 건 그 이유를 딱히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드러나는 실수나 잘못을 해서 아이들이 쑥덕쑥덕 하는 거면 차라리 낫습니다. 고치면 되니까요. 하지만 아무도 말을 해주지 않죠. 모호하고 막연한 상황에서의 불안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요.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대할지 전혀 예측하지 못하는 공포감과 확인할 수 없는 두려움,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겠는 막연함, 세상이 나에게 안전하지 않고 위협적이라는 불신감.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잘해보려고 해도 나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이 두렵고, 뭘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도 모르겠기에 자기확신, 자기신뢰도 부재하게 됩니다. 혜조씨. 혜조씨는 그런 피해를 입은 희생자입니다. 그건 혼자 힘으로 겪어내기 어려운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어요.
혜조씨는 그 상황을 잊기 위해 이마가 깨지고 무릎이 부서질 정도로 분투했지만, 남은 문제는 여전히 혜조씨의 삶에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후유증이 남아 있는 거죠. 특히 아이를 키우며 트라우마가 더욱 고통스럽게 되살아난다고 느꼈을 거예요. 부모의 주된 책무 중 하나가 아이들에게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르치는 거니까요.
무엇보다도 혜조씨. 당신의 인생과 아이의 인생을 동일시하지 마세요. 혜조씨와 아이는 다른 사람입니다. 당신의 인생과 아이의 인생은 결코 그 길이 같지 않아요. 아이는 친구들과 즐겁게 지내며 우정을 쌓을 수도 있습니다. 그 기회를 혜조씨의 경험 때문에 막는 우를 범하지 마세요. 걱정이 많이 될 거예요. 하지만 설사 그런 일이 생긴다 해도 혜조씨와 똑같은 결과를 밟지 않게 해주면 됩니다.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극복하고 치유되도록 도와주면 되는 거예요. 혜조씨가 그런 결과에 이르게 된 건 자신이 무능해서가 아니라 적절한 치유의 도움을 받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집단 괴롭힘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해주고 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 방법들은 정말 많이 있어요. 미리 걱정하지 마세요.
학창시절의 고통에서 이제는 벗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두운 그림자의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혜조씨에게도 치유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자신의 트라우마를 치유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아이를 잘 키우는 엄마로서의 유능함을 배우는 길이기도 할 거예요. 대하기 힘든 사람들을 잘 대하는 방법을 배우고, 갈등을 처리하는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혜조씨.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의 균형입니다. 주먹을 쓰는 힘이 아니라 내적 힘의 균형이죠. 그걸 잘 유지해나가는 건 모든 사람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이 내적 힘의 균형을 위해서는 상대의 반응과 무관하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상식적 수준에서 공격적이지 않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해요. 여기서 핵심은 ‘상대의 반응과 무관하게’입니다. 상대는 너무나 다양하기 때문에 내가 예측하는 반응으로 나오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은 상식적 수준에서 표현을 한다면, 상대가 그걸로 화를 내는 건 그 사람의 몫이지 나의 몫이 아니라는 걸 반드시 기억하세요. 지금은 관계에서 많이 위축돼 있기 때문에 자연스런 자기 표현을 잘 못하고 있을 거예요. 다른 엄마와만 친하게 지내는 엄마가 있다면, “너무해~”, “그때 좀 섭섭했지. 내가 좀 삐쳤었다”, “이런 말을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오늘 느낌이 아주 좋아요. 또 만나면 안 될까요?” 이런 말들을 연습해 보세요. 혜조씨의 감정과 생각을 상식선에서 말하는 연습을 열심히 하다 보면 그 자체가 치유의 과정이 될 뿐 아니라 혜조씨의 성장이 아이의 사회성을 키우는 데도 매우 큰 도움을 주게 될 거예요.
따돌림의 트라우마가 있든 없든, 내 아이가 저런 일을 겪지 않을까 하는 노심초사는 대한민국의 모든 부모가 가진 공포입니다. 사건이 발생하면 부모는 적극적으로 아이와 얘기를 하고 보호해줘야 합니다. “엄마, 애들이 날 미워하는 것 같아”라고 아이가 말하면, “야야, 애들이 어릴 때는 다 그래. 장난치는 거야” 그러지 마세요. 아이의 감정을 과소평가하거나 가볍게 넘기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 너무 과민하게 반응해도 안 됩니다. “뭐라고? 누구야, 누구?” 전화해서 따지고 어른들끼리 싸움이 벌어지면, 아이는 ‘나의 감정을 전달했더니 큰 일이 벌어지더라’ 싶어 다음부터는 ‘아이쿠’ 하면서 아예 말을 안 합니다.
어느날 갑자기 아이가 부모와 눈을 잘 안 맞추거나, 큰소리에 깜짝 놀라거나, 말을 잘 안 하거나, 눈물을 보이거나, 식사량이 줄었다거나, 학교 가기 싫다거나, 수면에 문제가 있거나 한다면 반드시 확인을 해보셔야 합니다. 그렇다고 캐듯이 물어보면 절대로 안돼요. “요즘 학교 어때? 재밌는 친구가 있나? 지내다 보면 건드리는 애들도 있잖아. 혹시 장난꾸러기 없니?” 엄마가 편안하게 많이 물어보시고 “언제나 엄마가 너를 보호해줄 거야. 엄마는 네 편이니까 항상 얘기해라” 이렇게 늘 문을 열어두세요. 그리고 이런 사실을 알게 됐을 때는 빨리 담임교사를 만나 적극적으로 진지하게 의논해야 합니다. 소극적인 태도는 절대로 도움이 되지 않아요. 관심과 열성을 갖고 개입하는 것과 과잉반응하고 싸움을 벌이는 건 다른 거니 잘 구별해야 하고요.
혜조씨가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은 혼자 끙끙 앓으면서 부모에게 어려움을 털어놓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이죠. 따끔하게 혼을 내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부모에게도 아이들은 혼이 날까 봐 말을 하지 않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따끔하게 혼을 내면 아이가 배울 거라는 생각부터 올해는 반드시 교정했으면 좋겠어요. 좋게 가르치면 될 일을 왜 자꾸 따끔하게 혼을 내나요.
반대로 부모가 지나치게 “너는 정말 의젓해” “너 최고다. 잘한다” 칭찬만 해도 부모를 실망 시킬까 봐 자기 어려움을 얘기 안 할 수도 있습니다. 칭찬은 좋지만 아이가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항상 주어야 해요. “너는 이런 점은 정말 잘하고 있고 대견해. 그런데 네 나이로 봤을 때 모든 것을 혼자 해결하기는 어렵지. 어려운 문제는 늘 부모와 의논을 해야 해. 엄마 아빠는 조건 없이 늘 네 옆에 있고 도와주는 사람이니까 항상 의논하자” 이런 메시지를 아이들에게 지속적으로 줘야 합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이렇게 예쁜 내 아이가 혹시 학교 가서 이유 없이 다른 아이를 따돌리는지도 확인해봐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진정한 우리 어른의 자세죠. 언제나 내 아이가 피해자가 되는 것만은 아닙니다. 사랑스러운 내 아이가 천진난만하게도 학교에 가서 그런 일을 벌일 수도 있다는 걸 염두에 두시고 아이를 지도해줘야 해요. 내 아이가 가해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고 아이를 살펴보는 것, 그게 진정한 어른의 자세예요.
혜조씨.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당신의 인생과 아이의 인생은 절대로 같은 인생이 아니에요. 엄마로서 아이가 겪을 어려움에 대비하고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많이 있습니다. 아이가 학교에 가서 친구들과 즐겁게 지낼 수 있는 가능성을 잊지 마세요. 아이가 가진 가능성을 예단하지 마세요. 혜조씨가 자신을 치유하기 위한 노력과 연습을 계속하는 것,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 치유되는 것이야말로 아이의 사회성을 높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걸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정리=박선영 기자 aurevoir@hankookilbo.com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지면을 통해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해결되지 않는 내면의 고통 때문에 힘겨운 분이라면 누구든 신청해 보세요. 사연은 한국일보 사이트(http://interview.hankookilbo.com/store/advice.zip)에서 상담신청서를 내려 받아 작성하신 후 이메일(advice@hankookilbo.com)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선정되신 분의 사연과 상담 내용은 한국일보 지면에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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