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까지 차로 오를 수 있는 태기산과 양구두미재
이국적인 풍경의 한라산과 1100도로
겨울에도 꽃은 핀다. 앙상하게 남은 나뭇가지에 눈이 엉겨 안착해 봄꽃이 올 때까지 기다린다. 해발 고도 1,000m 이상 지역에선 습도와 온도가 합심해 눈꽃이 녹지 않도록 숨을 불어 넣는다. 이를 상고대라고 한다. 눈꽃과 상고대는 겨울 여행의 백미다. 눈꽃 구경하러 가기 좋은 드라이브 코스를 소개한다.
●정읍 내장산 + 내장산로
내장산(763m)은 패션왕이다. 계절마다 가장 잘 어울리는 옷을 갈아입고 수많은 관광객에게 손짓한다. 겨울엔 순백의 옷을 입고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자태를 뽐낸다. 이름처럼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보물 같은 풍경과 조우한다. 소복하게 눈이 쌓여 고즈넉한 사찰 내장사의 문을 하나씩 지날 때마다 세상과 멀어지는 기분이다.
두꺼운 양말과 등산화를 단단히 신고 일주문에서 벽련암을 거쳐 내장사에 이르는 길을 걸어보는 걸 추천한다. 서두르지 않고 2시간이면 충분하다. 내장산 일대는 주변 다른 지역에 비해 눈이 많이 내린다. 서쪽 바다의 습기를 가득 머금은 구름이 이곳에 와서 찬 기온을 만나 눈으로 내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내장산에 쌓인 눈은 유독 촉촉하다.
탐방안내소까지의 내장산 진입로(내장산로) 자체가 환상적인 드라이브 코스다. 길 양쪽에 나무들이 죽 늘어서 긴 터널을 이룬다. 나뭇잎들은 가을엔 단풍으로 화려하고 찬란한 빛을 내다 겨울에 이르러 남김없이 떨어진다. 나뭇잎이 떨어진 자리엔 하얀 눈이 내려앉아 나그네를 맞는다.
●횡성 태기산 + 양구두미재
태기산(1,261m)엔 11월부터 눈이 쌓인다. 정상에 군부대가 있고 능선을 따라 풍력발전기가 있어 자동차로 오를 수 있는 몇 안 되는 산 중 하나다. 하지만 그 길이 만만하지는 않다. 겨울에 정상까지 오르려면 윈터 타이어를 끼거나 타이어에 체인을 꼭 감아야 한다. 풍력발전기까지는 길이 잘 정비돼 있다. 태백산맥을 타고 불어오는 칼바람을 맞으며 도는 육중한 바람개비 아래 잠시 차를 세우고 곳곳에 피어난 눈꽃을 감상해보시길.
태기산의 원래 이름은 덕고산이었는데 진한(기원전부터 4세기까지 지금의 경북 지역에 분포한 작은 나라)의 태기왕이 이곳에서 신라에 항전했다 하여 태기산으로 부른다. 그 흔적으로 태기 산성이 남아 있다.
스포티한 운전을 좋아한다면 태기산에 오르는 길 또한 즐겁다. 태기산 자락을 지나는 양구두미재 길은 한때 서울과 강릉을 잇는 주요 고갯마루였다. 길이 워낙 험하고 구불구불해 이용하는 운전자가 많지 않지만 그만큼 짜릿한 재미가 있다. 해발고도가 980m나 돼 신나게 길을 내려오다 보면 기압차 때문에 귀가 멍해질 수도 있다.
●제주 한라산 + 1100도로
겨울의 한라산(1,950m)은 작은 히말라야로 변한다. 태초의 대자연을 떠올리게 하는 이국적인 광경은 신비하고 고요하다. 크리스마스트리로도 인기 높은 구상나무들은 이미 온 몸에 흰 눈을 뒤집어썼다. 그 모습을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태양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외로운 행성에 와 있는 느낌이다. 이름처럼 은하수를 잡아당기는 산이다. 바람은 산 여기저기에 눈을 흩뿌리며 제주도 특유의 눈꽃을 피운다.
특히 1100도로 북쪽의 눈꽃이 북서풍의 영향으로 더 정교하다. 성판악, 관음사, 영실 등 한라산을 탐식할 수 있는 코스는 많다. 어디를 돌더라도 하루 안에 왕복할 수 있어 부지런히 움직이면 서울에서 출발해 당일치기 등반도 가능하다.
제주시와 중문을 연결하는 1100도로는 이름 그대로 1,100m 높이의 한라산 옆구리를 가른다. 국내 국도 중 해발 고도가 가장 높다. 겨울엔 길 양쪽에 늘어서 있는 나무들에 흰 눈이 쌓여 동화에나 나올 법한 환상적인 길로 변한다. 하지만 감동은 아직 이르다. 앞서 이야기한 한라산의 설경에 비하면 맛보기에 불과하다.
●무주 덕유산 + 500리길
덕이 많고 너그럽다 하여 이름 붙여진 덕유산(1,614m)은 겨우내 눈꽃 천지다. 무주리조트에서 곤돌라를 타고 하얗게 깔린 운해를 감상하며 설천봉(1,530m)까지 쉽게 오를 수 있다. 덕분에 가족 단위로 부담 없이 환상적인 설경을 구경할 수 있다. 설천봉에는 스키와 스노보드를 즐기는 이들도 있다.
곤돌라에서 내려 정상까지는 천천히 걸어서 20~30분 걸린다. 이때부터가 하이라이트다. 상고대 열매가 가득 열린 나뭇가지들은 설국으로 향하는 터널을 만든다. 정상에 올라 사방으로 탁 트인 풍광을 바라보고 깊게 숨을 들어 마셔보시라. 겨울의 묵직한 기운이 온몸을 휘감을 것이다.
덕유산을 둘러싼 ‘500리길’은 시간을 두고 오랫동안 달리며 머물고 싶은 길이다. 일반적으로 전북 무주에서 시작해 경남 함양과 경북 김천까지 아우른다. 이름 그대로 그 길이만 약 200㎞에 달한다. 덕유산에서 내려와 이 길만 따라가도 무주호와 안국사, 무주 구천동 계곡, 나제통문, 동호정 유원지, 사과 테마파크, 호두마을 등 다양한 유적지와 관광지에 들러볼 수 있다. 굽이굽이 휘어도는 구절양장 길은 덤이다.
조두현 기자 joe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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