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들은 민주주의를 외치며 광장에 모인 천만 시민이 개헌을 요구한다고 믿는 것 같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믿는 것은 자유다. 하지만 민주주의 사회는 자신의 믿음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할 자유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더욱이 대의 민주주의를 대표하는 정치인에게는 자신의 믿음이 마치 시민의 이해를 대변하는 것 같이 행동하는 기만을 허락하지 않는다. 단 한 번이라도 광장에 나와 민주주의를 외친 평범한 시민이라면 광장에 모인 천만 시민의 요구가 ‘개헌’이 아니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할 수 있다.
‘낫 놓고 기역 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 평범한 진리를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한다고 스스로 믿고 있는 정치인만 모른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개헌을 주장하는 정치인에게 묻고 싶다. 한국사회에서 부와 특권의 대물림이 지속되며, 돈과 권력 있는 부모를 만난 것이 능력이 되고, 정경유착과 부패가 지속되는 것이 단임제 대통령 중심제 때문인가. 권력구조를 의원내각제 또는 분권형 대통령제로 바꾸고, 대통령의 임기를 4년 중임제로 전환하면 돈이 신분이고 권력형 부패가 만연한 한국사회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까.
민주화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한국사회의 정당 정치가 시민사회의 다양한 이해를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은 패악 무도한 박근혜 정권을 종식하기 위해 광장으로 쏟아져 나온 천만 시민의 모습을 통해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정당이 시민의 다양한 이해를 대변하는 정치를 했다면 천만에 가까운 시민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광장에 나올 이유가 없었다. 광장 민주주의의 부활은 제도권 정당 정치와 그 안에 안주해 기득권을 누리는 정치인의 실패와 무능을 보여주는 가장 분명한 증거다.
현실이 이러한데도 시민의 다양한 이해를 대변하지도 못하는 제도권 정당과 정치인이 모여 권력구조를 개편하기 위해 개헌을 논한다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생선가게를 또다시 고양이에게 맡길 수는 없다. 광장에 모인 천만 시민의 요구는 분명했다. 점점 더 심화되고 있는 불평등과 불의의 뿌리를 뽑으라는 것이다. 그 뿌리가 대통령이라면 끌어내리고, 재벌이라면 해체하고, 복지부동한 관료라면 퇴출시키고, 정당이라면 해산시키라는 것이다.
더욱이 정당 문제는 새누리당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천만이 넘는 시민이 광장에 나와 민주주의를 외치는데도 민주당과 국민의당은 개혁을 실천하기는커녕 대통령 선거라는 잿밥에만 마음이 있는 것 같다. 유일한 원내 진보 정당인 정의당은 변변한 개혁안조차 내놓지 못하고 있다. 이러려고 정치를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시민은 바보가 아니다. 그리고 시민은 역사를 기억하고 있다. 시민은 지난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이루어진 개헌이 항쟁의 주체였던 시민을 배제한 체 권위주의 정권과 보수 야당 간의 권력분점을 위한 정치적 타협이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민주주의를 위해 광장에 모인 시민은 정치권의 권력분점을 위한 개헌에 반대한다. 시민의 요구는 개헌 이전에 불의하고 불평등한 한국사회를 개혁하라는 것이다.
시민이 문제를 내주었으니, 답을 찾는 것은 정당의 몫이다. 피폐해진 민생문제를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증세를 포함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공적 일자리를 늘리고, 공적 복지를 확대해야 한다. 안보논리가 더는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수구세력의 집권 수단이 되지 못하게 한반도 평화체제를 구축해야 한다. 집회의 자유조차 매번 법원의 판결에 의존해야 하는 반쪽짜리 민주주의를 온전한 민주주의로 만들어야 한다. 시민이 정치공학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후보를 선택할 수 있는 ‘결선투표제’를 도입하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한 개혁의 시작이 될 수 있다. 광장은 개헌이 아닌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개혁 없는 개헌은 광장을 밝히고 있는 촛불에 대한 반역이다.
윤홍식 인하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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