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은 지도자보다 심부름꾼을 원한다

이전기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국민은 지도자보다 심부름꾼을 원한다

입력
2017.01.04 04:40
0 0

박근혜 정부를 보내고 새로운 정부, 새로운 지도자를 맞이하게 될 정유년(丁酉年) 새해. 비선실세에 휘둘려 국정을 파탄 낸 박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며 광장에 선 시민은 숫자 1,000만을 찍었다. 2017년을 맞이하는 촛불은 이제 대한민국을 탈바꿈시킬 새 대통령의 출현을 갈망하고 있다.

특히 정치적 냉소계층으로 치부되던 2030 청년세대, 정치현안과 담을 쌓은 세대로 여겨졌던 10대들은 촛불혁명의 주역이었다. 광장 민주주의를 체험한 이들은 현실의 문제점을 바꿀 수 있는 새 지도자에 대한 희망을 구체적으로 이야기했다.

촛불 청년들은 ‘꿈을 접지 않아도 되는 2017년’을 열망했다. 지난달 31일 강추위에 털모자를 쓰고 청와대로 향하던 임용고시 준비생 서모(25)씨는 “적성이 뭔지도 모른 채 고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들어가도 학비에 허덕이며 정신 없이 취업난을 견뎌야 한다”며 “돈 걱정, 학벌 걱정 없이 끼와 재능을 발산하면서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 수 있는 지도자를 뽑겠다”고 말했다. 비선실세 최순실씨 딸 정유라씨의 대학입시ㆍ학사 부정에 누구보다도 분노한 10대들은 개성을 존중하는 공정한 교육시스템을 마련해 줄 지도자를 희망했다. 지난달 2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 나왔던 유사라(19)양은 “나라가 엉망인데도 대학에 가기 위해 야간자율학습을 하느라 TV로만 성난 함성을 지켜볼 수밖에 없는 현실에 좌절했다”며 “언제 어디서든 ‘말 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는 지도자가 선택되기를 소망한다”고 말했다.

촛불민심이 바라는 지도자상은 조금씩 달랐지만, 세대를 불문하고 국민들은 “군림하는 지도자보다 봉사하는 심부름꾼” 같은 지도자를 원했다. 그것은 광장에서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1조의 가치를 몸소 누렸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반 친구 김수정(왼쪽)ㆍ김오은 양 “10대에 추억을 만들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주세요.”

개성 존중하는 교육제도 만들어 주는 지도자

“다양성을 키워줄 수 있게 교육 시스템부터 바꿔야죠.”

정유라씨의 대학입시ㆍ학사 부정에 분노한 10대는 촛불집회의 당당한 주역이었다. 청소년들은 “나이 어린 우리도 아는 사실을 왜 대통령만 모르냐”며 주말마다 서울 광화문광장에 나와 정권 심판을 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들은 박 대통령이 물러나야 하는 이유를 획일화한 교육제도에서 찾았다.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들뜬 지난달 24일 오후 고교 2학년 같은 반 친구인 김오은(18) 김수정(17)양은 광장에 서 있었다. 오은양은 초등학생이 되기도 전에 삶을 영어유치원에 저당 잡혔던 친구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뛰어 놀 시간도 없는 나라가 된 것 같다”고 했다. 10대의 추억을 만들어 줄 수 있는 지도자가 그가 꿈꾸는 대통령 상이다. 수정양은 “현 정부가 역사 국정교과서에 목을 맨 것도 획일화를 원하기 때문”이라며 “개성이 말살되는 시대였던 독재시대를 미화한 교과서로 왜곡된 가치관을 주입하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을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대안학교에 다니는 박찬순(19)군은 시험 한 번으로 인생을 규정 짓는 대학입시의 철폐를 희망한다. 그는 좋아하는 여행과 영화공부를 하고 싶어 수천만원의 등록금을 감당해야 하는 대학 진학을 과감히 포기했다. 박군은 “교육 주체인 청소년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도록 교육감을 뽑을 수 있는 권리라도 가졌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드러냈다. 곧 냉혹한 경쟁사회와 맞닥뜨려야 하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도 이들이 촛불을 내려 놓을 수 없는 이유다. 유시아(18)양은 “지금 20대가 겪고 있는 청년실업 문제가 우리의 고민이 되지 않으려면 민생을 제대로 읽고 해결 방안을 국민과 논의하는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

창업준비생 한우철(왼쪽)ㆍ태원석씨 “지도자를 뽑기 전 비전을 먼저 세워야 합니다.”

국민 머슴 어디 없소

“그런 질문부터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새해엔 어떤 지도자를 원하느냐’는 질문에 창업준비생 태원석(30)씨는 이렇게 반문했다. 1,000만 촛불을 통해 직접 민주주의의 힘을 보여 준 만큼 앞으로 국가 설계의 주체도 시민이 돼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태씨는 “지난 40여년간 우리는 ‘박정희를 뽑으면 나라가 산다, 노무현이 대통령이 되면 세상이 바뀐다’는 식으로 개인의 뛰어난 리더십에 의존하려 했다”며 “박근혜 대통령에 대해서도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라는 믿음 하나로 버텼지만 지난 4년의 결과는 참담하기까지 하지 않느냐”고 되물었다. 한우철(31)씨 역시 “민주주의의 주인공인 시민들에게 앞으로 어떤 나라에서 살고 싶은지 묻고 그 다음 지도자를 고르는 게 순서”라고 강조했다. 한씨는 “청년들은 새로운 도전조차 하지 못하는 교육ㆍ노동 환경에 절망한다”며 “청년배당처럼 청년들의 어깨를 짓누르는 짐을 덜어주는 정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는 그래서 중요하다. 이공계 대학원생 이모(26)씨는 “박 대통령도 임기 초에는 청년창업과 이공계 연구를 지원하겠다고 공언했으나 2년 안에 가시적 성과를 내라고 독촉하는 근시안적 투자에 불과했다”고 비판했다. 현실과 동떨어진 청년공약은 청년문제에 대증적으로만 접근한 정치권 탓이 크다. 정치인 상당수가 50대 이상 남성인 상황에서 이들이 내놓는 공약 역시 포퓰리즘일 수밖에 없다는 진단이다. 취업준비생 이은영(26)씨는 “우리나라 정치인들은 언제나 선거철에만 국민 앞에 몸을 낮출 뿐 공약을 지키지 않고 군림하려 했다”며 “국민이 제시한 비전을 ‘주인의 명령’으로 생각하고 떠받드는 인물을 선출하는 것이 청년들이 바라는 민주주의”라고 강조했다.

남평우씨 “부의 편중을 바꿀 개혁적 지도자 어디 없나요.”

이번에는 경제민주화 약속 지켜야죠

“1987년과 2016년의 함성이 다시 들리는 날은 없어야 합니다.”

직장인 문종율(48)씨는 고교 1학년, 중학생 1학년 자녀들의 손을 잡고 촛불집회에 꾸준히 참여해 왔다. 87년 민주화항쟁 당시 “뒤에 숨어 있었다”는 그는 아이들에게만은 살아 숨쉬는 민주주의 현장을 느끼게 해주고 싶었다. 문씨는 “30년 가까이 될 듯 말 듯하면서도 한국사회가 한 발짝 더 나아가지 못한 것은 정권의 잘못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정치ㆍ자본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고 국민을 대표할 수 있는 대통령이 나올 때가 됐다”고 말했다.

독재 타도를 부르짖으며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했던 40, 50대는 자녀 세대에게 마음의 빚이 남아 있다. 민주주의 기반을 어렵사리 마련하고도 기득권층의 부패 고리를 끊어내지 못해 자식들에게 새로운 대한민국을 물려 주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해서다.

‘부의 불평등’ 해소는 그 출발점이다. 대학생활 4년 내내 민주화 시위에 참가했다는 남평우(55)씨는 “그 동안 국가를 개조할 기회가 여러 번 있었지만 모든 개혁 과제는 ‘경제가 어렵다’는 볼멘소리에 묻혀 차일피일 미뤄져 왔다”고 지적했다. 독일에서 공부하며 사회민주주의의 진수를 맛봤다는 최모(52)씨는 “옆집에 사는 청소부와 내 지도교수가 같은 종류의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녀도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며 “가진 사람들에게 세금을 더 내게 하는 것은 빼앗는 게 아니라 나눔이라는 명제를 실천하는 정책”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새 대통령이 박근혜 정부가 외면해버린 ‘경제민주화’ 버튼을 다시 누르기를 바라고 있다. 직장인 홍석경(58)씨는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차별하고, 근로기준법도 지키지 않은 기업들을 보면서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가지라는 헛된 말을 쏟아내서는 안 된다”며 “산업화, 정치민주화를 넘어 성숙한 경제민주주의를 구현하는 시대가 하루 빨리 정착돼야 한다”고 소망했다. 김의수(57)씨는 “지도자가 누가 되느냐 이전에 국민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권이 먼저 지켜져야 한다”며 “경제민주화를 버팀목 삼아 복지 대한민국의 기초를 닦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국민행복 가져다 주는 도도한 정의 실현을

“도도한 정의만이 국민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죠.”

자영업자 임병헌(68)씨는 박근혜 정부 4년을 ‘서민들에게 너무 힘든 시기’라고 규정했다. 장사가 안 되는 것은 둘째치고 정치인들은 그릇된 희망만 앵무새처럼 되뇌며 국민을 우롱하기 일쑤였다. 임씨는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기업가 출신이라 경제는 살릴 것이란 믿음이 강했고, 박 대통령은 그 아버지의 향수에 젖어 내심 기대하던 서민들이 많았을 것”이라며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없는 자의 행복을 빼앗아가기만 했다”고 고개를 저었다.

60대 이상 장년층은 촛불집회를 겪으며 ‘도도한 정의’를 입에 올렸다. “일단 잘 살고 보자”는 논리에 앞세워 민주주의는 뒷전으로 미루는 국가운영 방식은 유통기한이 끝났다는 얘기다. 새 지도자는 단순한 양적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ㆍ사회적 민주화에 대한 신념이 굳건해야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김성두(67)씨는 촛불집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주말마다 충남 안면도에서 첫 차를 타고 상경했다. 서른네 살인 둘째 아들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다. 김씨는 “아들이 꽤 알아주는 기타리스트인데 순수예술로는 벌이가 안돼 중ㆍ고교에서 특별활동 강사 일을 하며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젖먹이 자식한테도 연간 1,000만원이 드는 세상에서 육아와 결혼을 사치스럽다고 생각하는 요즘의 ‘비혼’ 세태를 이해하게 됐다고 한다. 김씨는 “어른들은 청년들에게 무심코 ‘젊은 나이에 너무 돈 따지지 말라’고 잔소리하지만 실상은 노력 만으로는 잘 살 수 없게 한, 정의를 외면한 기성세대의 책임이 크다”고 반성했다.

새로운 정의의 선결 과제는 역시 ‘적폐청산’이다. 임모(69)씨는 “여전히 박 대통령을 지지하는 내 나이 또래 노인들을 보면 수많은 잘못에는 눈 감고 심지어 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는 것 같아 씁쓸하다”며 “부도덕한 대통령과 비선실세에 부역한 재벌들, 세월호 참사까지 모든 적폐의 진상이 낱낱이 밝혀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20대 손자 셋을 둔 박용우(64)씨는 젊은 세대를 위해 좋은 대통령을 고르는 방법을 일러줬다. “살아 보니 그럴싸한 말을 늘어놓는 지도자는 적임자가 아니었습니다. 말수가 적더라도 자신이 한 말은 꼭 지키는 사람을 선택하세요.”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기사가 저장 되었습니다.

기사저장이 취소 되었습니다.

2017 한국 사회 3대 과제
한국일보가 직접 편집한 뉴스 네이버에서도 보실 수 있습니다. 뉴스스탠드에서 구독하기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